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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답사/울진] 울진 봉평리 신라비 - 국보 제242호

들꽃(野花) 2008. 3. 31. 23:57

울진 봉평리 신라비 (蔚珍 鳳坪里 新羅碑) / 국보 제242호

소재지 :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

 

삼국시대 신라의 비석으로, 1988년 봉평리 논 객토작업으로 2-3개월 방치되어 있던 것을 마을 주민(권대선)이 발견하고 신고하였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에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나,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비는 자연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전체적인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깝다. 비문은 한쪽 면에만 새겨져 있는데, 글자수는 400자 정도이다. 글씨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조의 영향을 받은 해서체이나, 예서체의 모습도 보인다.

 

내용은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라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체를 사용하여 파악이 어렵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만하다. 기본 줄거리는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들어감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이 일어나자, 신라에서는 육부(六部) 회의를 열고 대인(大人)을 보내어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신라가 동북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건립한 비로,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 사회 전반에 걸치는 여러 면들을 새롭게 검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또한 법흥왕 때의 율령반포와 육부제의 실시, 왕권의 실태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울진봉평신라비는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으로 비문의 일부가 마멸되어 정확한 판독이 어려우나 신라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라가 영토확장으로 동해안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곳 지역을 새로 편입함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사태가 일어나자 신라에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육부회의(六部會議)를 열고 대인(大人)을 파견하여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비의 크기는 길이가 204cm, 글자가 새겨진 부분의 위폭 32cm, 아래폭 54.5cm이다. 비는 사각장방형의 자연석 화강암에 한면을 다듬어 비문을 새겼는데, 규모는 작지만 형태는 고구려 장수왕 2년(414)에 세운 광개토왕비와 유사한 고구려계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비를 통하여 신라 육부제(六部制) 실시와 법흥왕의 율령반포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입증 등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울진봉평신라비의 원문

갑진년(524) 정월 15일 탁부 모즉지매금왕(법흥왕)과 사탁부의 사부지(법흥왕의 동생) 갈문왕, 본파부의 무부지 간지, 잠탁부의 미혼지 간지, 사탁부의 이점지 태아간지, 길선지 아간지, 일독부지 일길간지, 탁(부)의 물력지 일길간지, 신육지 거벌간지, 일부지 태나마, 일이지 태나마, 모심지 나마, 사탁부의 십사지 나마, 실이지 나마 등이 하교하신 일이다.

 

따로 영을 내리시길, "거벌모라(지금의 울진군 중심 지역)와 남미지는 본디 노인(복속된 지역민을 낮추어 부른 말)이었다. 비록 노인이었지만 앞선 시기에 왕께서 크게 법을 내려주셨다.(율령 반포 등을 통해 노인의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주셨다.) 그런데 길이 좁고 오르막도 험난한 이야은성에 불을 내고 성을 에워싸니 대군이 일어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한 자들은 (처벌해야 사람들이 땅을 안전하게 하고 왕을 높일 것이다.) 대노촌은 값 다섯을 함께 부담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는 여러 노인법을 받들라."고 하셨다.

 

신라 6부에서 얼룩소를 잡아(배를 가르고 피를 뿌리는 의식을 행하였다. 일을 처리한) 대인은 탁부의 내사지 나마와 사탁부의 일등지 나무, 구차 사족지, 탁부의 비수루 사족지, 거벌모라 도사(지방관의 명칭) 졸차 소사제지, 실지(지금의 삼척시) 도사 오루차 소사제지이다. 거벌모라 니모리 일벌, 미의지 파단, 탄지사리 일금지와 아대혜촌 사인(지방관 보좌역) 나이리는 장 60대에 처하고, 갈시조촌 사인 나등리 거△척, 남미지촌 사인 익사는 장 100대에 처하고, 어즉근리는 장 100대에 처한다. 실지 군주(주의 장관)인 탁부 개부지 나마가 일을 맡았다. 글 쓴 사람은 모진사리공 길지지와 사탁부 선문 길지지이고, 돌에 새간 사람은 탁부의 술도 소오제지와 사탁부의 모리지 소오제지이다.

 

석비를 세운 사람은 탁부 박사이다. 이때에 하교하시기를, "만약 이와 같이 하는 자는 하늘에서 죄를 얻으리라.(논어에 나오는 구절임)"고 하셨다.

거벌모라의 이지파 하간지와 신일지 일척이 살아 있을 적에 일을 마쳤다. 398이다.(의미 미상)

 

 

 

 

 

 

 

2008년 2월 24일 봉평신라비를 찾았을 때의 비석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