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대첩의 큰 별이 잠든 곳으로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玉山面) 국사리(國仕里)에 있는 강감찬의 묘가 있으며 바로 옆에는 사우인 충현사가 자리잡고 있다.
강감찬 장군의 묘는 잠시 실전되었다가 1963년 후손들이 묘소의 지석(誌石)을 발견한 후 1964년 분묘를 만들고 1967년 비를 건립하였다. 묘역은 약 600㎡이며 상돌·석물(石物:羊)·문인석·망주석(望柱石)·장명등(長明燈)과 추모비가 있다.
특히, 그가 태어난 낙성대는 인헌공 강감찬(948∼1031) 장군이 태어난 집터로, 그가 태어나던 날 밤에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낙성대’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그 자리에는 장군이 태어난 곳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3층 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자세히 알아보면
1010년 (현종1)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에 침입했다. 이 때 강조가 나가 싸우다 지자, 신하들은 왕에게 항복하기를 권했으나, 끝내 이에 반대하고, 하공진(*진양 하씨 시랑공파조/하륜의 선조)을 적에게 보내어 설득시켜 물러가게 하였다.
그가 서경 유수에 임명되었을 때, 거란은 다시 고려를 괴롭히기 시작하여 거란이 고려의 강동 6주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을 거절하자, 1018(현종 9) 거란은 다시 10만의 군사로 쳐들어왔다. 이 때 71세였던 그는 20만 군사를 이끌고 흥화진(의주/*평안북도 의주군 威遠面)으로 진군하여 거란군과 싸웠다. 여기서 그의 군사들은 큰 밧줄에 쇠가죽을 꿰어 삽교천(의주 동쪽의 큰 냇물) 상류의 물을 막고, 부근의 산속에 숨어있다가 적군이 나타나자 갑자기 막았던 강물을 터놓아 적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적장 소배압은 나머지 군사들을 이끌고 황해도까지 밀고 내려왔으므로 이들과 싸움을 벌여 물러나게 하였다. 도망치는 적군을 공격하여 귀주에서 완전히 쳐부수었는데, 이것을 귀주 대첩이라고 한다. 그 후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하였다. 뒤에 강감찬은 추충협모안국공신의 호를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과 글을 벗하여 조용히 살았다. 서울시 관악구에 있는 낙성대는 그가 태어난 사적지이다. 저서로는 '낙도 교거집(樂道郊居集)','구선집(求善集)' 등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84세로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크게 장사를 지내 주었다
이곳을 찾으면서 아쉬웠던 것은 위대한 장군의 묘역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시는 바와 같이 초라하기그지없다는 것이다. 하루빨리 올바른 이정표가 만들어 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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