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원은 조선 13대 명종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와 세자빈 공회빈 윤씨의 무덤이다. 세자의 묘로 조영하였으므로 봉분에 난간석과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으며 석물이 작고 간단하다. 봉분 주위로 석양과 석호가 번갈아 배치되어 있고, 봉분의 양 옆으로는 석마를 대동한 문석인이 자리 잡고 있다.
1563년(명종 18) 13세의 어린 나이에 순회세자가 요절하자 순창원을 조영하였다. 그로부터 29년 후인 1592년(선조 25) 세자빈 공회빈이 세상을 떠나 순창원에 합장하였다.
순회세자는 13대 명종의 원자로 1551년(명종 6) 태어나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황대임의 딸과 혼담이 오갔으나 그녀가 병약하여 1년 넘게 가례를 미루자 1559년(명종 14) 윤옥의 딸로 세자빈이 교체되어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순회세자는 가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도 잇지 못한 채 1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명종의 대를 이어 중종의 손자 하성군(훗날 선조)이 대통을 이었다.
공회빈은 명종의 하나뿐인 아들인 순회세자의 부인이다. 처음에 순회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된 황대임의 딸이 맹장염으로 추정되는 심한 복통을 이유로 가례를 미루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를 양제(세자의 후궁에게 내리는 종2품의 품계)로 삼고 1559년(명종 14) 공회빈이 가례를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병약했던 순회세자가 13세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자 공회빈은 30년을 홀로 지내다가 1592년(선조 25) 세상을 떠났다.
공회빈 윤씨가 죽던 1592년(선조 25)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실이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따라서 선조는 의주로 달아나기 직전 공회빈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그녀를 궁궐 후원에 임시로 가매장 했다. 시간이 흐르고 한양이 탈환된 후 돌아와 보니 가매장한 무덤은 파헤쳐져 흔적도 없었고 시신 또한 사라지고 없었다.
선조는 사람을 풀어 후원을 모두 파헤치며 시신 발굴에 나섰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선조는 시신도 없이 신주만 모셨는데, 그 뒤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때, 신주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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