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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답사/고양] 고양 서오릉 - 사적 제198호

들꽃(野花) 2009. 8. 15. 09:08

고양 서오릉 (高陽 西五陵) / 사적 제198호

소재지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서오릉은 5개의 왕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오릉 지역이 무덤지역으로 선택된 이유는 세조 3년(1457)에 세자 장(덕종)이 사망하자, 풍수지리설에 의해 경릉이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서오릉은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무덤인 창릉, 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제2계비 인원왕후의 명릉,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무덤인 익릉, 21대 영조와 정성왕후의 무덤인 홍릉을 말한다.

 

서오릉은 동구릉 다음으로 큰 조선왕조 왕실의 가족무덤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품격에 따라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 왕의 생모·왕세자·빈의 무덤은 ‘원’, 대군·공주 등의 무덤은 ‘묘’로 구분하여 불렀다. 서오릉에는 5개의 능 이외에도 조선왕조 최초의 ‘원’으로 명종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의 무덤 순창원과 숙종의 후궁으로 많은 역사적 일화를 남긴 희빈 장씨의 무덤이 있다.

 

 

 

 

 

 

 

 

 

익릉 :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단릉이다. 봉분에는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다른 왕릉과는 조금 다르게 석주가 아닌 동자석 상단부에 십이간지를 글자로 새겨 놓았다. 문석인은 조관을 쓰고 있으며, 두 손으로 홀을 쥐고 있다. 뒷면의 관대에는 꽃문양이 보인다.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어 표정이 살아 있다. 짧은 목에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턱을 홀 바로 위에 올려 놓은 형상이다. 무석인은 투구에 있는 상모를 뒤로 넘겼다. 갑옷의 어깨 부분에는 아주 작은 도깨비 문양을 넣었고, 소매는 활동하기에 편리하도록 터져 있다. 흉갑 부분은 구름으로 장식되어 있다. 대부분의 석물이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왕릉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정자각은 능침 언덕 아래에 있다. 현종의 숭릉 정자각과 같이 당시 유행하던 익랑이 딸려 있는 것이 특이하다.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의 참도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참도 중간에 계단을 두어 지형에 따라 설치하였다.

 

 

 

 

경릉 :

  추존왕 덕종과 그의 비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동원이강릉의 형태로 조영되었다.능침의 배치는 왕이 우측에, 왕비가 좌측에 모셔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경릉에서는 왼편에 왕릉이, 오른편에 왕비릉이 있다. 왕릉은 난간석이나 망주석 등이 없고 석양과 석호도 2쌍이 아닌 1쌍만 설치되어 있다. 이는 덕종이 세자로 있을 때 죽었고, 부왕인 세조가 간소한 장례 의례에 준해 사대석(莎臺石) 등을 설치하지 말 것을 명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왕비는 생전에 덕종의 추존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능제도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성종대에 이르러 왕릉의 규범에 따라 덕종의 능침에도 의물을 가설하고자 하였으나, 덕종의 비이며 당시 대왕대비였던 소혜 왕후가 석물을 가설치 말라 하여 그 모습 그대로 남게 되었다.

  왕릉과 왕비릉의 문무석인은 모두 신장이 매우 크고 당당해보이도록 제작되었는데, 마모가 심해 현재는 그 윤곽만 살필 수 있다.

 

 

 

 

 

 

대빈묘 :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의 묘이다. 곡담이 봉분 주위를 에워싸고 있고, 봉분 앞쪽으로는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의 양 옆으로는 문석인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희빈 장씨가 1701년(숙종 27) 10월 10일, 인현왕후를 무고하고 저주한 죄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자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장사지냈는데, 1969년 현재의 서오릉 지구로 옮겼다. 훗날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여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에 추존하였다.

 

 

 

홍릉 :

  21대 임금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이다. 영조는 왕후의 능지를 정하면서 장차 함께 묻히고자 왕비 능의 오른쪽에 자리를 비워두고 쌍릉 형식으로 조영하였다. 능 위의 석물도 훗날 자신의 능과 함께 조성될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배치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능은 정순왕후와 함께 동구릉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곳은 현재 빈 터로 석물만 쌍릉 양식으로 남아 있다. 

 

 

 

 

창릉 :

  서오릉의 영역 내의 왕릉으로 조영된 최초의 능으로, 병풍석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봉분 주위에 난간석을 두르고 있다. 석물 배치는 일반 왕릉과 같고, 양쪽 능침 아래 중간에 정자각과 홍살문을 잇는 축의 양 옆으로 수라방, 수복방 등이 대칭하여 배치되어 있다.
  왕비 능침의 문석인은 왕릉과 달리 왼손에 지물을 쥐고 있으며 투구가 길고 짧은 상모(象毛)가 있다. 허리띠는 좌에서 우로 대각선을 이루고 있다. 무른 석재를 사용한 탓인지 다른 왕릉에 비해 풍화가 심하여 상태가 양호하지 못하다. 예종릉 앞 장명등은 지붕돌이 없어진 상태이다.

 

 

 

 

 

 

순창원 :

  조선 13대 명종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와 세자빈 공회빈 윤씨의 무덤이다. 세자의 묘로 조영하였으므로 봉분에 난간석과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으며 석물이 작고 간단하다. 봉분 주위로 석양과 석호가 번갈아 배치되어 있고, 봉분의 양 옆으로는 석마를 대동한 문석인이 자리 잡고 있다.

  1563년(명종 18) 13세의 어린 나이에 순회세자가 요절하자 순창원을 조영하였다. 그로부터 29년 후인 1592년(선조 25) 세자빈 공회빈이 세상을 떠나 순창원에 합장하였다.

 

 

 

수경원 :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무덤이다. 후궁묘의 예로 조영하여 석물들이 단촐하게 꾸며졌다.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는 1764년(영조 40)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능은 경기도 고양 연희 신촌리(현재 서울시 신촌)에 조영되었으나, 한일합병 이후인 1920년대 연희전문학교가 인근에 개교하고 확장하면서 교내에 수경원이 위치하게 되어 1968년 6월 현재의 서오릉으로 천장하게 되었다.

 

 

명릉으로 가는 길

 

명릉 :

  19대 숙종과 그의 첫 번째 계비인 인현왕후, 두 번째 계비인 인원왕후 세 사람을 모신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조영되고, 인원왕후의 능은 다른편 언덕에 단릉 형식으로 모셔져 동원이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보통 우상좌하의 원칙에 따라 동원이강릉의 오른쪽 언덕을 왕이 차지하는 일반적인 왕릉과 달리 명릉에서 가장 낮은 서열의 인원왕후의 능이 가장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능역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여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 치수도 실물 크기에 가깝게 하는 등 간소한 제도로 조영하였는데, 이는 조선 능제의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다. 8각 장명등도 4각으로 바뀌었으며, 능침에는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다.

  한편 인현왕후 승하 후 두 번째 계비로 들어왔던 인원왕후는 사후 부군인 숙종의 곁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인현왕후와 숙종이 잠든 명릉에서 약 400보 떨어진 언덕에 자신의 능지를 미리 잡아두었다.
  그러나 인원왕후가 1757년(영조 33) 71세로 승하하였을 때, 영조는 미리 정해둔 자리를 두고 지금의 자리에 그녀를 모셨다. 인원왕후가 정해둔 자리에 능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넓은 소나무 숲을 벌채하는 등 막대한 인력과 국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연으로 인원왕후는 생전에 소원했던 것보다 숙종과 더 가까운 곳에 묻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숙종의 능보다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에 잠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