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제9대 성종 - 순릉(원비 공혜왕후)
순릉은 조선 9대 성종의 비 공혜왕후의 단릉이다. 전체적인 상설제도는 공릉과 같지만 순릉은 왕비의 능이므로 공릉에 비해서는 석물이 많이 있다. 순릉의 장명등은 공릉의 것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어 세부적인 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조선 전기 장명등의 전반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점에서 비슷하다. 문무석인은 좌우 1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릉의 무석인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는 칼을 잡고 무관의 갑옷을 입고 목을 움츠린 모습이다. 갑옷의 선은 뚜렷하지만 얼굴은 다소 경색된 표정을 하고 있다.
정자각의 오른쪽에 있는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공혜왕후의 비가 있다. 비에는 전서(篆書)로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고 쓰여 있고, 1817년(순조 17)에 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릉의 금천교가 원형을 잘 보전하고 있으며 현재의 진입 모습은 변형된 것이다.
공혜왕후는 1474년(성종 5) 4월 15일 승하하여, 시호를 공혜, 능호를 순릉이라 하고 같은 해 6월 7일 현재의 위치에 안장하였다.
공혜왕후는 1456년(세조 2) 10월 11일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막내딸로 연화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공릉에 묻힌 장순왕후와는 친자매 사이였다. 1467년(세조 13) 1월 12일 12세의 나이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잘산군과 가례를 올려 천안군부인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왔으나 예의 바르고 효성이 지극해 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왕비의 자리에 오른 지 5년 만인 1474년(성종 5) 4월 1일 열아홉의 나이로 소생 없이 창덕궁 구현전에서 승하하였다. “죽고 사는 데는 천명이 있으니, 세 왕후를 모시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순릉의 지석에는 공혜왕후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가 전한다.
왕후는 나면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조금 커서는 온화하고 의순하며 숙경하였다. 1467년 세조가 성종을 잘산군으로 봉하고 배필을 가릴 때 뜻에 맞는 사람이 없었는데, 왕후가 덕 있는 용모를 지녔음을 알고 불러 보고서 혼인을 정하였다. ...... 왕후를 들여와 뵈이니 언동이 예에 맞으므로 세조와 대왕대비가 매우 사랑하였다. 그 때 왕후는 나이가 어렸으나 노성한 사람처럼 엄전했으며, 늘 가까이 모시되 경근하기가 갈수록 지극하니 이 때문에 권우가 날로 더해갔다.
위에서 밝혔듯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딸이다. 한명회에게는 슬하에 아들이 1명, 딸이 4명 있었는데, 그 중 넷째 딸이 공혜왕후이며, 공혜왕후가 잠들어 있는 순릉 바로 옆의 공릉에 잠든 장순왕후가 바로 셋째 딸이다. 두 사람은 자매간이었지만 왕실에서는 언니와 동생 사이가 아닌 시숙모와 조카며느리의 사이가 된 것이다. 자매가 나란히 왕비에 오른 예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으로서, 한명회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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