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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제11대 중종 - 정릉(중종)

들꽃(野花) 2010. 6. 23. 17:52

[조선왕릉] 제11대 중종 - 정릉(중종)

 

  • 능호 : 정릉
  • 위치 :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1
  • 지정번호 : 사적 제199호
  • 조성시기 : 정1562년(명종 17)
  • 능의구성
  •     정릉은 조선 11대 왕 중종의 능이다. 중종에게는 3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사후에는 어느 왕비와도 함께 있지 못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능인 선릉 옆에 홀로 묻혀, 조선시대의 몇 안되는 단릉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정릉의 상설은 성종의 선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석양과 석호의 전체적인 자세는 선릉과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조금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반면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경향이 있다. 문무석인은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큰 편이다. 문무석인 얼굴의 퉁방울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어 정릉의 수난을 상기시켜 준다. 석호의 익살스러운 입 모양은 보는 사람을 흐뭇하게 한다.

     

        정릉의 원찰인 봉은사는 보우가 주지로 있던 사찰로, 794년 연회국사가 견성사(見性寺)란 이름으로 창건한 이후 1498년(연산군 4)에 중창하면서 봉은사로 개칭하였다.

     

  • 능의역사
  •     인종은 1545년(인종 1) 1월 5일 중종을 고양에 예장하고 능호를 희릉(禧陵)이라 하였다. 그리고 약 한 달 후, 고양시의 현재 서삼릉 능역 내에 있는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 오른쪽 언덕에 능을 새로 조영하고, 능호를 정릉으로 고쳤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1562년(명종 17) 에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에 의해서 중종의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의 능이 있는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졌다.

     

        문정왕후가 봉은사 주지 보우와 의논하고, 그곳은 풍수지리가 좋지 않으며 선릉의 동쪽이 풍수상 길지라 하여 옮긴 곳이었으나 지세가 낮아 여름철 홍수 때면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입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던 계비 문정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단릉(單陵)으로 안장되어 있다. 문정왕후의 바람으로 인해 천장된 현재의 정릉은 임진왜란 때 선릉과 함께 왜구에 의해 능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 생몰년도 : 1488년 ~ 1544년
  • 재위기간 : 1506년 ~ 1544년
  • 생애이야기
  •     중종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 사이의 둘째 아들이자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1488년(성종 19) 3월 5일 태어났다. 1494년(성종 25)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다가 1506년에 연산군의 계속된 폭정에 대항하여 박원종, 성희안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에 의해 조선 11대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중종은 즉위 초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1515년(중종 10) 이후에는 조광조를 내세워 철인군주정치를 표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고 사림파를 등용하였으나, 과격한 개혁정치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당파논쟁이 끊이지 않아 기묘사화가 일어나는 등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향약이 전국화되어 유교적 향촌질서가 자리를 잡았으며,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으며, 사치를 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연산군 축출에 반대한 아버지로 인해 폐위당한 단경왕후, 인종의 어머니 장경왕후,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까지 3명의 왕비를 두었으며, 1544년(중종 39) 11월 14일 왕세자에게 전위하고, 그 다음날 창경궁 환경전에서 5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 일화
  •     1506년(연산군 12) 중추부지사 박원종이 이조참판을 지낸 성희안, 이조판서 유순정, 군자부정 신윤무 등과 함께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어 난을 일으켰다. 그들은 밀약 후 왕이 장단 석벽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1506년 9월 1일, 박원종, 성희안, 신윤무 등은 훈련원에 무사들을 결집시켰다. 훈련원을 출발한 반정세력은 창덕궁 어귀의 하마비동에서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등을 만나 함께 진을 치고 경복궁에 있는 대비에게로 가서 거사의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대비는 신료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추대를 허락하는 교지를 내렸다. 교지를 받은 반정주도세력들은 먼저 권신 임사홍, 신수근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연산군은 옥새를 내어주었고, 반정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도착한 진성대군은 대비의 교지에 힘입어 조선 11대 왕 중종으로 등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