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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추존황제 문조 - 수릉(문조, 신정황후)

들꽃(野花) 2011. 1. 25. 05:04

[조선왕릉] 추존황제 문조 - 수릉(문조,신정황후)

 

 

  • 추존왕 문조(文祖)
  • 능호 : 수릉
  • 위치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7-2
  • 지정번호 : 사적 제193호
  • 조성시기 : 1890년(고종 27) 8월 30일
  • 능의구성
  •     수릉(綏陵)은 하나의 봉분에 혼유석 역시 하나만 마련되어 있어 마치 한 사람만을 위한 단릉처럼 보이지만, 문조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합장릉이다. 수릉 이전의 왕릉은 일반적으로 봉분 앞이 초, 중, 하계 3단의 높이로 나뉘어, 중계에는 문석인이, 보다 낮은 하계에는 무석인이 배치되었다. 그러나 수릉에서는 중계와 하계가 합쳐져 문석인과 무석인이 같은 공간에 배치된다. 이는 신분제도의 변화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상설제도는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따라 영조 때부터 따르게 되었다.

       문석인은 금관조복에 얼굴이 길쭉하고 눈과 입술이 선적으로 가늘게 표현되었다. 어깨를 움츠리고 목을 앞으로 빼고 있는 형태에서 조선시대 후기 인물조각의 전형성을 볼 수 있다.

  • 능의역사
  •     효명세자가 1830년(순조 30) 승하하자 성북구 석관동 의릉 왼쪽 언덕에 세자의 무덤형식인 원(園)으로 능을 조영하고, 연경묘라고 하였다. 그 후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1835년 즉위하자 그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이라고 하였다. 1846년(헌종 13)에는 풍수상 불길하다는 의논이 제기되어 천장하기로 하고, 현궁을 발굴하여 정자각에 봉안하였다. 그리고는 그 해 5월 19일에 발인하여, 20일에 양주 용마산 아래로 천장하였다.

       1855년(철종 6) 8월에 다시 능을 발굴하여 건원릉 좌측 언덕으로 천장하였다. 1890년(고종 27)에는 춘추 83세로 승하한 신정왕후를 수릉에 합장하여 모셨다. 1899년(광무 3)에는 익종은 문조익황제로, 신정왕후는 신정익황후로 다시 추존되었다.

     

  • 생몰년도 : 1809년 ~ 1830년
  • 생애이야기
  •    추존 황제 효명세자 문조(文祖)는 23대 왕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사이의 큰 아들이자 24대 왕 헌종의 아버지로, 1809년(순조 9) 8월 9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 1812년(순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827년(순조 27)에는 19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 어린 효명세자는 정조가 승하한 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였을 시기에 대리청정을 통해 강인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특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인재들을 고루 등용하였으며, 백성을 위하는 선정을 펼쳤다. 또한 실학파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교유하며 견문을 넓히고, 타문화 수용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원래 몸이 약했던 그는 아들을 얻은 이후 더욱 자주 의원에게 처방을 받아야 했고, 결국 1830년(순조 30) 5월 6일 22세의 젊은 나이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요절하였다.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으로 추대되고 고종 때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 일화
  •     남녘 못에 잠긴 용이 있으니 / 구름을 일으키고 연기와 안개를 토하더라 / 이 용이 조화가 많으니 / 능히 사해의 물을 옮기리로다.

       위의 「잠룡(潛龍)」이라는 시는 추존 황제 문조가 세자 시절에 지은 것이다. 자신을 물속에 잠긴 용으로 표현한 것이 앞으로 강력한 군주로서 조선을 이끌어 나아갈 포부를 밝힌 듯하다. 실로 그는 세도정치에 시달린 아버지 순조의 희망이었으며, 대리청정을 하며 왕권을 강화하고,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한 결단력 있는 정책을 펼쳤다.

       한편 효명세자는 자주 궁궐 밖을 미행하였는데, 어느 날 북촌 자하동을 지나다가 글을 읽는 낭랑한 목소리에 끌려 한 집에 당도하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규수였다. 세자는 그 자리에서 박규수의 할아버지 박지원이 지은 『열하일기』를 함께 보는 등 그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훗날 박규수를 등용할 것을 굳게 약속하고는 궁궐로 돌아왔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결국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22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서로 교유하며 문명을 떨친 둘 사이의 약속은 결국 훗날 효명세자의 부인인 신정왕후에 의해 실현되었다.

     

     

  •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
  • 생몰년도 : 1808년 ~ 1890년
  • 생애이야기
  •    신정익황후 조씨는 1808년(순조 8) 12월 6일 조만영의 딸로 태어났으며, 12세 때 효명세자와 가례를 올려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효부라는 칭찬을 듣던 세자빈 조씨는 1827년(순조 27년) 헌종을 낳았고,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올라 죽은 남편인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자 왕대비가 되었다. 1857년(철종 8) 순종비인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그리고 1863년(철종 14) 철종도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실의 권한은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가 쥐게 되었다.

       왕위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 이하응과 손을 잡고, 흥선군의 둘째 아들 고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또한 안동 김씨 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하여 고종을 아들로 삼아 철종이 아니라 익종의 뒤를 잇게 했다. 그리고 내전에 고종의 옥좌를 마련하고 자신은 그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며, 명성황후가 정치에 참여하기 전까지 흥선대원군과 함께 정국을 주도했다.

       대왕대비 조씨는 국가가 여러 재난에 시달리자 눈물을 흘리며 죽지 않은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 대왕대비는 1890년(고종 27) 4월 17일 춘추 83세로 경복궁 흥복전에서 승하하여, 그 해 8월 30일 수릉에 합장했으며, 1899년(광무 3) 11월 17일에 신정익황후로 추존되었다.

  • 일화
  •    효명세자가 일찍 승하함으로 인해 왕비로서의 영화도 누려보지 못하고, 안동김씨의 세도에 눌려 지내던 신정익황후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과 함께 손잡고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후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의 권력을 거머쥐었다. 꽃문양 담으로 유명한 경복궁의 자경전은 재건된 것이기는 하나, 흥선대원군이 그녀를 위해 1867년 지은 건물이다.

      또 현재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에는 신정익황후의 40세 생신을 축하하는 잔치모습을 그린 8폭 병풍이 소장되어 있다. 8폭 중 7폭은 전각, 나무, 산수를 채색하여 그렸고, 마지막 폭은 도총관, 조기영 등 9명의 관등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도화서의 일류급 화원들이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1847년(헌종 13) 정월 초하루 창덕궁 인정전 앞뜰에서 거행된 잔치에는 400여 명이 참석했는데, 관직에 따라 서로 다른 관복을 입은 문무백관과 행사에 참여하는 인물 그리고 창검을 들고 도열해 있는 군관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해 당시 궁중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구리의 동구릉내에 있는 조선왕릉

    사적 제19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