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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답사/구리]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 - 보물 제1742호

들꽃(野花) 2012. 7. 21. 05:30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 (九里 東九陵 崇陵 丁字閣) / 보물 제1742호

소재지 : 경기 구리시 인창동 66-25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顯宗)과 비 명성왕후의 능으로 동구릉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왕과 왕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이다. 숙종 즉위년(1674)에 현종의 능을 조성하였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숙종 10년(1684)에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능을 왕릉 옆에 나란히 조성하였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능역 남쪽이 저습하여 진입로 등이 쉽게 물난리를 겪는 등 진입부분이 지형적으로 취약하지만 능역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거리가 비교적 멀고 정자각이 경사지 위에 있어서 멀리서 보기에도 우뚝한 모습이 돋보인다.

 

  숭릉 정자각은 숙종 즉위년(1674)에 현종의 능을 조성하면서 건립되었다. 건립 이후 정자각은 몇 차례 수리를 거쳤으며, 순조 28년(1828)에는 정자각 월대를 개축했다는 기록이 순조실록에 보이고, 마지막 수리 기록은 고종 16년(1879)에 계단석을 수리한 기록이다.

 

  정자각의 지붕을 팔작으로 조성한 것은 인조 장릉의 정자각부터였다. 장릉 정자각은 정전 3칸, 배위청 2칸으로 5칸의 팔작지붕 형태였다. 이를 전례로 동구릉에 조성된 효종의 정자각도 팔작지붕으로 조성되었고, 현종 14년(1673)에 효종의 영릉(寧陵)을 여주로 천릉하면서 정자각의 규모를 8칸으로 확대하여 정전 5칸, 배위청 3칸으로 조성하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구성하였다. 이후 『현종산릉도감의궤』에는 숙종 즉위년(1674)에 숭릉을 동구릉에 조성하면서 영릉의 정자각을 표본으로 조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효종영릉천릉도감의궤』에는 영릉 천릉 시 정자각의 제도를 광릉 정자각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8칸 정자각은 광릉 이후에 기록상으로 선릉, 정릉, 효릉, 강릉, 장릉 등에서 꾸준히 나타나고 있으며 영릉, 숭릉, 명릉, 익릉, 의릉의 정자각이 8칸으로 지어졌다. 이와 같이 정자각이 8칸으로 규모가 확대되는 것은 영악전이 폐지되며 그 기능을 정자각이 수용하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현존하는 8칸 정자각은 숭릉을 비롯하여 익릉, 휘릉, 의릉의 정자각이 있다. 그러나 숭릉을 제외한 나머지 정자각은 맞배지붕의 형태이며, 숭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42기(남한 40,북한 2)중 유일한 팔작지붕 정자각으로 정전 5칸, 배위청 3칸의 8칸 정자각이다. 공포는 정전은 일출목 이익공, 배위청은 이익공의 구조이며 규모가 8칸으로 확대되었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감 있게 건축된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숭릉 정자각은 영릉(寧陵)의 제도를 따라서 정전 5칸, 배위청 3칸의 전체 8칸으로 지어진 건물이며 유일하게 팔작지붕인 정자각이다. 또한 이러한 규모나 지붕 형식은 창건된 1674년의 형태를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17세기 정자각의 다양한 유형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례라는 점에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