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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답사/구리]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 - 보물 제1743호

들꽃(野花) 2012. 7. 22. 05:30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 (九里 東九陵 穆陵 丁字閣) / 보물 제1743호

소재지 : 경기 구리시 인창동 66-6

 

  목릉은 조선 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으로 현재 동구릉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목릉의 능역은 선조 33년(1600)의인왕후가 승하하자 왕비릉인 유릉(裕陵)의 터로 정해진 곳이다. 광해군 즉위년(1608)에 선조가 승하 후 선조의 능인 목릉이 건원릉의 서편에 조영되었는데, 능에 물이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상소에 따라 인조 8년(1630)현 위치로 천릉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하여 목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인조 10년(1632)에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계비의 능을 왕릉의 동편 언덕에 조영하게 되어 현재와 같이 세 능을 이루게 되었다.

 

  광해군 즉위년(1608)에 건원릉 서쪽에 조성되었다가 지세가 좋지 않다는 풍수가의 견해와 터에 물이 차는 등의 이유로 인조 8년(1630)건원릉 동쪽으로 천장되었다. 천장 이후에도 여러 차례 건물 수리가 있었지만 건물 자체에 손을 댄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고종 16년(1879)에 계단석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기단은 장방형으로 정전이 배위청보다 한 단 높다. 정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다포식으로 공포를 짰다. 현존하는 정자각 중에 다포식 공포를 갖춘 건물은 이 건물이 유일하다. 공포는 내외 1출목이며 외부 살미는 약간의 곡선을 갖추면서 아래로 처져 있고 소첨차와 대첨차는 높이에 비해 길이가 길어 안정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17세기 초에 다시 지어진 문묘 대성전의 공포 짜임과 유사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어서 이 시기에 다포식 공포의 좋은 사례로 평가된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배위청은 정면 1칸, 측면 2칸이고 기둥위에 바로 보머리가 얹혀지며 기둥 사이에 행공첨차를 끼워 화반 역할을 하도록 꾸몄다. 정전 측면은 고주 둘을 세워 벽체를 구성했는데 이런 방식은 정자각에서는 보기 드물다. 나머지 창호나 화방벽을 한 벽체 등은 대체로 조선시대 일반적인 정자각의 제도를 잘 따르고 있다.

 

  목릉 정자각은 초창과 이건한 모습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현재의 모습은 인조 8년(1630)에 이건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조선왕릉 정자각 가운데 유일한 다포형식의 건물로 살미의 형태나 구조가 장식화 되기 이전의 전기적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으로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