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제26대 고종 - 홍릉(고종,명성황후)
홍릉은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능역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다. 능침의 삼계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의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다. 능침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수들은 배전 앞, 참도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다.
능침은 병풍석으로 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고 혼유석1좌, 그 양 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그 앞으로 사각장명등을 설치하였다. 석물의 배치는 홍전문과 배전 사이에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순으로 대칭 되어 있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두 단으로 구분되어 있던 기존의 것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 옆이 한 단 낮은 삼단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 수복방, 수라간, 비각, 소전대, 어정 등이 배치되어 있다.금천교 안쪽 좌측에 일반 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궁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진입부의 낮은 지역에 원형의 연못에 원형의 섬이 있고 식재 되어 있다.
1895년(고종 32) 일본 정부의 사주로 낭인에 의해 경복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한 명성황후는 궁궐 밖에서 시신이 소각되었다.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복호되고, 1897년(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당초 동구릉의 숭릉 오른쪽 언덕에 숙릉을 조성하다 국장이 중단된 후 그해 1897년 11월 청량리 천장산아래 새장지를 정하고 국장을 치르게 되니 홍릉이란 능호가 시작되었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춘추 67세로 고종이 승하하자 그해 3월 4일 현재의 위치에 조성하면서 천장론이 일던 명성황후의 릉도 옮겨와 합장으로 예장하였다.
고종은 1852년(철종 3) 7월 25일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정선방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1863년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위결정권을 쥐고 있던 신정왕후 조씨가 고종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였으며, 그를 익성군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한 뒤 왕위에 오르게 했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높여 국정을 총람케 했다. 그로부터 10년간 흥선대원군의 치세 아래 있던 고종은 장성하면서 친정의 의욕을 내비쳐 아버지와 대립하다가 1873년(고종 10) 친정을 선포하게 되었다. 동시에 외척인 민씨 일가의 권력이 강해졌고, 강화도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하는 등 대외 개방정책을 취하였다.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으로 인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을미사변 등 큰 사건들을 뒤로 하고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광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압력이 심해지는 가운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으며, 그들의 강요로 인해 그해 7월 양위조서를 내리고 순종에게 통치권을 물려주었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춘추 67세로 승하하였으며, 이때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이 유포되어 3.1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896년(건양 1)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왕세자(훗날의 순종)가 두 대의 가마에 앉아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황토재(지금의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하였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와 협의하여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친일파 대신들을 처형하도록 명하고, 이로 인해 을미사변과 맞물려 급진적 개혁으로 국민의 감정을 자극한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친러, 친미파 인사로 내각이 구성되었다. 일시에 지지기반을 상실한 일본 측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내세워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요청하였으나 고종은 불안과 공포가 도사린 궁전보다는 노국공관의 일실이 안정하니 당분간 환궁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1년의 긴 시간을 보냈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하여 독립제국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 2) 9월 25일 경기도 여주에서 증 영의정 민치록의 딸로 태어났다. 9세 때 부모님을 여의고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16세 되던 해인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 책봉되었다. 외척의 세도정치를 경계한 흥선대원군의 의지 때문에 권세가 없는 민씨 집안의 딸을 낙점한 것이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과 맞서 외척들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다졌으며, 고종에게 친정을 선포하게 하여 정권을 잡았다. 쇄국정책에 맞서 일본과 수교하고, 1882년에는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롭자 궁궐을 탈출하여 피신생활을 하였는데,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하여 군란을 진압하고 다시금 정권을 잡았다. 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때에도 청나라를 개입시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1894년 일본정권을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이 갑오개혁을 시작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일본공사가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을 궁중에 잠입시켜 경복궁 옥호루에서 그녀를 난자,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이다. 일본의 강압에 못이긴 고종은 승하한 명성황후를 서인으로 폐위시켰다가 그 해 10월 복호시키고, 명성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쇄국정책을 펼쳤던 흥선대원군에 맞서 명성황후는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일관성 없는 이른바 널뛰기 외교로, 일본, 청나라, 러시아 세력과 차례로 손잡으며 나라에 혼란을 초래했고, 결국 스스로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94년 흥선대원군이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갑오개혁을 주도하자, 그녀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사주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미우라는 1895년 10월 2일 한성신보사에 있는 낭인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를 공사관으로 불러 거액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을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정부에서는 일본 훈련대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통고하고,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한 일본은 명성황후의 시해 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정하였다. 일본인 자객들은 명성황후의 처소인 옥호루로 들이닥쳐 궁녀들 사이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내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낭인들은 시신을 궁궐 밖으로 끌어내 불에 태웠으며, 그 후 일본은 고종에게 승하한 명성황후를 서인으로 폐위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불운한 최후를 맞은 명성황후는 그 해 10월 복호되었고, 명성이라는 시호를 받고, 고종과 함께 지금의 홍릉에 묻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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