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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왕릉] 제27대 순종 - 유릉(순종, 동비 순명효왕후, 동계비 순정효황후)

들꽃(野花) 2013. 5. 13. 06:00

[조성왕릉] 제27대 순종 - 유릉(순종, 동비 순명효왕후, 동계비 순정효황후)

 

  • 27대 순종(純宗)
  • 능호 : 유릉
  •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 지정번호 : 사적 제207호
  • 조성시기 : 1926-06-11
  • 능의구성
  •     유릉은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며, 조선 왕릉 중 한 능침에 세 명의 수장자를 합장한 유일한 동봉삼실형이다. 겉으로 보기엔 봉분이 하나여서 단릉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 순종과 그의 두 왕비가 잠들어 있다. 홍릉과 같은 황제릉 양식으로 조성하여 정자각 대신 침전이 자리하고, 기린, 낙타, 코끼리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형태의 석물이 있다.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다소 좁긴 하지만, 문무석인을 비롯하여 전체 석물의 조각은 홍릉의 것보다 사실적이면서 뛰어난 수법이 보인다. 특히 문석인은 특정인을 모델로 한 것처럼 사실적인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홍릉의 문석인과 같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다. 능침 주변에는 화문을 새긴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고, 가운데 혼유석과 사각 장명등이, 양 옆에는 망주석이 새워져 있다. 홍살문과 침전의 바깥 공간에는 어정(御井)이란 이름의 우물터가 남아 있다.

     

  • 능의역사
  •     순명효황후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인 1904년(광무 8) 11월 5일 경운궁에서 세자빈의 신분으로 춘추 33세에 승하하였다. 오늘날의 성동구 능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인 양주땅 용마산 기슭의 유릉에 같은 달 29일 안장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53세로 승하하자 그 해 6월 11일 순종을 홍릉 왼쪽 산줄기 언덕에 장사지내면서 순명효황후의 능을 천장해 와 합장하였다.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는 일반 백성들에 의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66년에는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가 1월 13일 춘추 71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승하하여 유릉에 함께 안장하였다.

     

  • 생애이야기
  •    순종은 1874년(고종 11) 2월 8일 창덕궁 관물헌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다음해인 1875년 2월 18일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82년(고종 19) 여흥부원군 민태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으며,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4년에 세자빈으로 맞이했던 순명효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을 황태자비로 맞이했다. 그리고 1907년 7월 19일 일본의 협박과 친일파 대신들의 강요로 황위에서 물러나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했고, 연호를 융희로 고쳤으며, 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순종 즉위 직후인 1907년(융희 1) 7월 24일 일본은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제로 체결하고, 1910년(융희 4)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다.  조선 왕조는 27대 519년만에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순종은 황제위에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1926년 4월 25일 53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 일화
  •    구차히 산 지 17년, 2천만 생민(生民 : 국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다. 지금의 병이 위중하니 한 마디 말을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백성들이 분명히 알게 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백성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 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

       1926년 4월 25일 새벽 6시 15분, 평소 병약했던 조선 27대 임금 순종이 53세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위와 같은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신문에는 '5백 년 종사의 마지막 황상(皇上) 승하'라는 제목의 기사가 전면을 장식하였다. 그 해 6월 10일 발인하였는데, 순종의 발인 행렬이 유릉을 향하여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단성사 앞을 지날 때였다.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나온 수많은 군중 속에서 수천 장의 격문이 날아오르며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황제의 인산일을 기하여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순종의 마지막 유언을 백성들이 알 리 만무하였으나, 마지막 국왕의 죽음은 백성들의 독립에 대한 욕망을 더욱 고조시키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