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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답사/문경] 문경 조령 관문 - 사적 제147호

들꽃(野花) 2007. 3. 11. 09:36

문경 조령 관문 (聞慶 鳥嶺 關門) / 사적  제147호
소재지 :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555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 시대 영남 대로를 차단한 남쪽에서 북쪽으로 차례로 제1·2·3관문 및 관문에서 좌우로 이어져 부속된 차단용의 성벽이다. 문경에서 주흘산((主屹山, 1,106m)의 서쪽 계곡으로 넘어서 충주와 괴산의 연풍(延풍)으로 빠져나가는 산골짜기 천험의 요지에 3개의 관문이 설치되어 있고, 관문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었다.


 

  삼국 시대에는 주흘산 동쪽의 하늘재가 주요한 통로로 이용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으나, 고려시대 이후로는 새재(鳥嶺)가 보다 가까운 통로로 이용되고, 조선 초기에는 초점(草岾)이 이미 관방요해처(關防要害處)로 인식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충주 사람 수문장 출신의 신충원(辛忠元)이 협곡처마다 약간의 시설을 하여 관방을 만들고, 이어 명군(明軍)이 관방을 강조하여 3관문 주변의 성벽이 축조되고 인근의 월악산에 겹으로 산성이 수축되었다고 여겨진다.

 

  이후 서울의 방어를 위한 남방 제1의 관문으로 인식되어 1708년(숙종(肅宗)34)에 세운 가장 남쪽의 제 1관문인 초곡성(草谷城)에는 관문의 루각에 주흘관(主屹關)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협문 2개가 있는 누각은 팔작지붕으로, 높이 3.6m, 너비 3.4m, 길이 5.4m의 홍예문(虹霓門)과 좌우의 성벽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으며, 성벽에는 총안(銃眼)이 있는 성가퀴가 설비되었고, 오른쪽에 커다란 수구문(水口門)이 설치되었다.

  제 1관문에서 3km 정도 상류로 올라 제 2관문인 조곡관(鳥谷關)과 중성(中城)이 있다. 중성은 1594년(선조(宣祖)27)에 축성된 것이며, 제 2관문의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좌우 협문이 3개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또 숙종 때 북적(北賊)을 막기 위하여 소백산맥을 넘는 험로 중의 하나인 조령(鳥嶺)에 산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지금의 제 3관문, 즉 조령관(鳥嶺關)이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좌우 협문 2개가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제 1관문 이외에 제 2·3관문은 허물어져 축대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에 제 2관문을, 1977년에 제 3관문을 각각 복원하였다.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은 적의 진로를 차단함에 있어 험준한 조령을 막으려 하였으나, 이미 적군이 쇄도한다하여 막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패하고 말았다. 그 뒤 조정에서는 이 실책을 크게 후회하여 조령에 대대적으로 관문을 설치할 것을 꾸준히 논의해 오다가 숙종 때 비로소 3개의 관문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세 관문의 성안에는 군사들의 진지(鎭址)·군창지(軍倉址) 등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경상 감사가 새로 부임할 때에 인장을 옛 감사와 교대할 때 교인(交印)하였다는 교구정지(交龜亭址)도 남아 있다.

 

 

 

 

 

 

 

사극 촬영시 사용하던 기구들

 

 

 

 

 

 

영남제1관(주흘관)

 

 

관찰사 선정비

 

 

 

폭포동

  이곳 바위 절벽은 여름철 집중 호우가 내릴때에는 떨어지는 빗물이 모여 폭푸수를 이루어 주변경관과 어우러진 일대 장관을 연출하여 시원함을 더해줍니다. 절벽 중앙에는 이름 모를 옛 선인이 남긴 瀑布洞이라는 힘찬 글씨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조산(造山)

  조산은 말 그대로 인위적으로 저성한 산을 일컫는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공허하거나 취약한 지점에 조산을 만듦으로써 그곳을 보강하고자 하는 의식이 담겨있다. 문경지역에서는 골맥이 서낭당으로 불리며 마을입구나 경계지점에 세워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한 곳이다.

 

 

 지름틀바우

  기름을 짜는 도구인 기름틀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지름틀」은 기름틀의 경상도 사투리다. 참께, 들께, 콩 등을 볶아 보자기에 싼 떡밥을 지렛대의 힘으로 눌러서 짠다. 기름틀은 받침들과 누름틀로 구성되는데 받침틀 위에 볶은 깨를 올려놓고 두터운 누름틀을 덮어 누르면 기름이 흘러내리게 된다.

  이 바위는 기름틀의 누름틀처럼 생겼다 하여 「지름틀바우」라 한다.

 

 

혈(穴)지른 자리

  조선중기(현종~영조연간) 시가문학의 대가인 옥서(玉所)권섭(權燮)선생이 조령산 줄기가 흘러내린 반롱명혈(盤龍名穴)이라 지칭한 곳으로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큰 인물이 날 자리라하여 왜병들(일설에는 명나라장수 이여송)이 혈을 질렀다고 하며(암벽을 절개하고 말목을 박았다고 함) 좌측 암벽(장수방위)이 주변의 다름 암벽과 달리 붉게 보이는 것은 당시에 바위에서 피를 흘린 흔적이라 한다.

  왜란 후 암벽위의 쇠 말목은 제거하였으나 나라의 큰 인물은 결국 태어나지 못하였다고 하는 민족이 애환이 서린 장소이다.

 

 

 

조령원터(鳥嶺阮址)

   주흘산 조령관문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위치한 조령원터는 고려와 조선조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공익시설이다.

 

 

 

 

무주암

  누구든지 올라 쉬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바위로 옛날에는 이 바위 아래에 새재길을 지나는 길손들을 위한 무인 주점이 있어 술과 간단한 안주를 준비하여 두었다고 하며, 길손들이 이 바위위에 올라 주변의 경치를 즐기면서 목을 축인 후 마신 만큼의 주대를 함에 넣고 가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새재골의 넉넉한 인심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바위위에 앉으면 맞으편 조령산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문경새데 과거길(옛길)

  영남에서 한양을 이룰 수 있는 길은 조령(문경새재)과 죽령 및 추풍령을 경유하는 세 갈래가 있는데 영남대로인 문경새재는 수 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왕래하였으며, 문경의 옛 지명인 문희(聞喜)에서 드러나듯 "기쁜소식을 듣게 된다"하여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도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길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길이다.

 

 

교귀정(交龜亭)

  교귀정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계인수하던 교인처(交印處)로 성종때(1465~1487년) 건립된 후 폐허가 되어 유지(遺址)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중창하였다.

 

 

용추폭포(龍湫)

  새재길 옆에 위치하며 예로부터 시인이나 묵객이 즐겨 찾는 경승지이다. 동국여지승람 聞慶懸篇에 의하면 『새재(鳥嶺, 草岾)밑의 동화원 서북쪽 1리에 있다. 폭포가 있는데 사면과 밑이 모두 돌이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용이 오른 곳이라고 전한다.

  바위에 새겨진 용추(龍湫)라는 큰 글씨는 "구지정(具志禎)이라는 분께서 숙종 25년(1699년)에 쓰다"라고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