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이충무공묘 (牙山 李忠武公墓) / 사적 제112호
소재지 :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산2-1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무덤이다.
충무공은 덕수이씨(德水李氏), 자(字)는 여해(汝諧)다. 부(父)는 병절교위 정(秉節校尉 貞)이요, 모(母)는 초계변씨(草溪卞氏)다. 1545년 4월 28일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무과에 합격하여 여러 곳의 군관 및 지방수령을 거쳐 임란 직전 전라좌수사로 있으면서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를 조련시키며 거북선을 제조하였다. 임란에 왜적이 몰려들어 육상에서는 아군이 처참한 패전을 당하여 적군의 북상을 막아내지 못했으나 해상에서는 충무공의 힘으로 곳곳에서 적을 쳐부수어 적선이 감히 남해를 돌아 서해로 올라가지 못했다. 옥포·노량·당포·한산도(玉浦·露梁·唐浦·閑山島)등 여러 곳에서 적을 여지없이 무찔렀다.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적군을 추격중 적의 유탄에 맞아 54세를 일기로 1598년 11월 18일 남해해상 관음포(觀音浦)에서 전사(戰死)하셨다. 그의 조카인 완(莞)이 공(公)의 유언에 의하여 공의 운명을 숨기고 대신 진두지휘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적이 패퇴한 뒤에 비로소 공의 상사(喪事)를 발표하였다. 고향인 아산으로 운상해 안장한 것은 그 다음해인 1599년(기해(己亥)) 2월이었다. 그후 이곳이 아닌 아산군 금성산(金城山)에 모셨다가 16년 후인 1614년(광해(光海) 6년)에 이곳 어라산(於羅山)으로 옮겨 모셨다.
묘의 봉분 주위에는 호석(護石)이 9매로 되어 있으며, 각자가 새겨져 있다. 묘 앞에 상석(床石)과 혼유석·향로석이 있으며 동자상 1쌍(童子像 1雙)·망주석 1쌍(望柱石 1雙)·석상 1쌍(石像 1雙)·문인석 1쌍(文人石 1雙)·광명등(光明燈)·묘비석(墓碑石)이 있다. 묘비는 숭정기원후삼병신이월 일추각립(崇禎紀元後三丙申二月 日追刻立)으로 되어 있다. 곡장(曲墻)은 사고석담의 반원형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75년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좌우진입 퇴로 및 계단과 함께 설치한 것이다.
묘 앞의 비각(碑閣)은 어제비의 비각이다. 이 어제비(御製碑)는 숭정기원후 삼갑인 월 일립(崇禎紀元後 三甲寅 月 日立) 으로 되어 있으므로 1794년(정조 18년)에 세워진 것이다. 또 묘소 입구에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이 비는 1693년(숙종 19년)에 건립하였다. 공(公)의 전지(戰地)에는 이항복(李恒福)의 전라좌수영대첩비(全羅左水營大捷碑)·이민서의 명량대첩비(李敏서 의 鳴梁大捷碑)·정기안의 제승당유허비(鄭基安의 製勝堂遺墟碑)·송시열의 통제영충렬사기(宋時烈의 統制營忠烈祠記)·이이명의 고금도유사기(李이命의 古今島遺祠記) 등의 많은 비갈(碑碣)이 있으며 공을 봉사하는 곳으로는 여수(麗水)의 충민사(忠愍祠), 해남(海南)의 충무사(忠武祠), 남해와 통영의 충열사(忠烈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이 있다.
어제신도비
이충무공묘소 가는 길 좌측에 있는 이충무공신도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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