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생가를 거쳐 최종 목적지인 강진의 다산초당을 찾아 오게 되었다.
이곳의 관람순서는 다산유물전시관을 보고 다산초당을 거쳐 백련사를 다녀오는 코스를 잡았다.
다산유물전시관은 다산 정약용의 일대기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초상화
정약용(1762~1836)
아명(兒名)은 귀농(歸農), 관명(冠名)은 약용(若鏞), 자(字)는 미용(美鏞), 호(號)는 삼미(三眉), 다산(茶山), 사암(俟菴), 열초, 당호(堂號)는 여유당(與猶堂)이다.
출생
1762년 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나주정씨 진주목사 정재원과 해남 윤씨(윤선도의 후손, 윤두서의 손녀)의 사남으로 태어났다.
과거급제
1782년 2월(20세)에 세자책봉을 경축한 증광감시에 합격하여 태학생이 되고, 그해 4월 회시에 합격한 후 1789년(28세) 3월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정조대왕 대면
1784년(22세) 여름 어전에서 중용강의 80여 조목에 관하여 바치고, 1789년 3월에 초계문신에게 대학을 강론하였다.
입신양명
초계문신(1789) ⇒ 예문관검열(1790) ⇒ 홍문관수찬(1792) ⇒ 암행어사(1794) ⇒ 동부승지(1795) ⇒ 금정찰방(1795) ⇒ 병조참지(1796) ⇒ 승정원동부승지(1797) ⇒ 형조참의(1799) ⇒ 사직(1799)
수원화성축조
1792년 12월에 정조의 명에 의하여 화성 설계, 거중기와 녹로를 고안하였다. 1794년에 수원화성을 착공한 후 1796년에 완공하였다.
유배생활
1801년 2월 신유사옥으로 셋째형 약종은 참형을, 둘째형 약전은 완도의 신지도로, 약용은 장기(경북 영일군)로 유배된 후, 1801년 황사영백서사건으로 11월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강진생활
다산은 처음 강진읍 동문 밖 주막에 기거, 1805년 혜장선사의 권유로 보은산방으로 이거한 후, 다시 1808년 봄 만덕산 서쪽에 있는 다산초당으로 옮겨 10년 동안 거주하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해배 이후
1818년에 이태순과 남골철의 중장에 의해 해배된 후, 다산의 고향으로 돌아가 여유당에서 여생을 마쳤다. 현재 고향인 남양주시 능내리에는 생가와 묘소가 있다.
동암
다산선생이 유배생활 중 초막을 짓고 거쳐하셨던 곳이며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하시어 우리나라의 실학을 집대성 한 곳이다.
일명 송풍암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동암 근처에 소나무들이 무성하여 솔바람이 불어오는 암자라 하여 불리우게 되었다.
다산 답사로
옛 사람이 말하기를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도 마음에 부끄럽지 않게 하라'고 했다. 나는 다시금 다산에 갈수가 없으니 죽은 자난 마찬가지다. 그러나 만일에 혹시라고 다시 가게 되더라도 모름지기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여야 될 것이다. - 정약용, 다산사경첩 중 다산제생문답증언문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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