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의 길,맛,멋따라♣/절집 여행

화성의 용주사

들꽃(野花) 2009. 7. 1. 00:50

용주사는 통일신라인 854년(문성왕 16)에 갈양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창건되었으며,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후기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중창하고 원찰로 삼았다. 낙성식 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다.

 

 

 

 

 

 

용주사에는 특이하게도 조선의 왕릉에서 볼 수 있는 홍살문이 있다. 이것은 융릉(사도세자의 능)의 현륭원의 능사로서 건립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삼문이 있는 데 이 또한 융릉과 관계가 있다.

 

 

 

 

 

 

대웅전

 

 

 

 

국보 제120호의 용주사 범종이다.

 

 

 

 

 

 

 

 

 

 

 

 

 

 

 

 

 

정조대왕의 효심

 

"백성들에게는 효를 강조하는 왕으로서 내 아버님께는 효도 한번 못하다니……"
 
왕세손이었던 정조 나이 11세 때, 할아버지 영조는 부친 장현세자(장조, 사도세자)에게 비참한 죽음을 내렸다. 뒤주에 못을 박고 큰 돌을 얹게 한 후 손수 붓을 들어 세자를 폐하고 서인을 만들어 죽음을 내린다는 교서를 발표한 것이다.
 
그로부터 8일 후,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어릴 때 목격한 당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를 때마다 정조는 부친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임금은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부모님의 은혜를 10가지로 나누지요. 그 첫째는 나를 잉태하여 보호해 주시는 은혜요, 둘째는 고통을 참고 나를 낳아주신 은혜며……"
 
설법을 다 들은 정조는 부친을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고 지금의 화산으로 묘를 옮김과 동시에, 용주사를 창건하여 기일뿐 아니라 평소에도 자주 용주사를 찾았다.
 
어느 초여름 날, 능을 참배하던 정조는 능 앞 소나무에 송충이가 너무 많아 나무들이 병들어 가고 있음을 보았다.
 
"허허 이럴 수가, 내 땅에 사는 송충이로서 어찌 임금의 아버님묘 앞에 있는 소나무 잎을 갉아먹는 단 말인가. 비명에 가신 것도 가슴 아픈데 너희들까지 이리 괴롭혀서야 되겠느냐."
 
임금은 이렇듯 독백하며 송충이를 한 마리 잡아 이빨로 깨물어 죽였다. 그 이후로는 이 일대에 송충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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