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전 앞에 수국이 만개하고 있다
죽은 고목에 달마도를 새김하여 놓았다.
강화도 전등사(傳燈寺)는 특이하게도 고조선시대부터 근대시대의 유적과 함께 많은 아픔 상처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전등사 주위는 울창한 수목으로 뒤 덮혀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지니고 있다.
강화도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한 봉우리씩 맡아 쌓았다는 삼랑성이 있고 그 삼랑성의 품안에 전등사가 있다. 삼랑성을 울타리와 입구로 삼고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72년)에 아도화상이 진종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이때부터 전등사는 호국 사찰로서 역사적 아픔을 간직하게 된다.
삼랑성 출입문을 지나면 양헌수 장군위 승전비가 있다. 이 비는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을 격퇴한 장군의 공을 기리는 기념비로서 1873년 강화도민이 세웠다고 전한다. 양장군의 승리로 전등사 사고에 보관되었던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인 ‘선원보’를 지키게 되었다.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결사호국의 각오로 전투에 임했던 장병들이 무운을 부처님께 빌기 위해 대웅보전의 기둥과 벽면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놓은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경내 서쪽 숲 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에 사고터가 남아있다.
전등사라는 이름은 고려 충렬왕 8년(1282년)에 그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승려 인기를 통하여 송나라의 대장경을 가져다가 보관하고 절에 옥등을 시주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나라에 가서 원세조의 딸인 제국공주와 결혼을 하고 아버지인 원종이 죽은 뒤 돌아온 충렬왕은 다시 정화궁주를 비로 맞아들였다. 정화궁주는 제국공주의 시기와 모함에 의해 왕의 총애를 빼앗기고 옥에 갇히기도 하는 한편, 아들마저 유폐를 당하는 시련을 겪게 된다. 이에 의지할 곳 없는 마음을 이곳 전등사에서 달랜 것으로 보여진다.
정화궁주가 엄마로서 아내로서 또 여자로서 갖은 모든 아픔과 시름을 달래 준 전등사는 또한 사랑을 배신한 여자에 대한 남자의 마음도 간직하고 있다.
대웅보전에는 사랑을 배신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부상으로 남아 있다. "대웅전 건립에 참여한 도편수가 공사 중에 우연히 마을의 어느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다. 이 도편수는 공사가 끝나면 그 여인과 살림을 차릴 결심으로 공사 노임을 모두 그 여인에게 맡기었다.
그러나 공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여인은 마음이 변해 도편수의 돈을 갖고 다른 남자와 도망쳐 버린다. 도편수는 실의에 빠져 한동안 공사를 진행하지 못하다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 지었는데, 대웅보전의 네 귀퉁이에 그 여인의 나체상을 조각해 넣어 무거운 지붕을 떠받들게 했다고 한다.
전등사에는 열매를 맺지 않음으로서 불법을 지킨 600년 된 은행나무도 아직까지 경내에 살아있다. 배불숭유 정책으로 관가는 사찰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관가는 은행나무에 은행이 열릴 쯤 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열매를 회수해 갔는데 어느 날은 관가에서 수확량의 두 배를 요구했다. 절의 한 동자승이 이 사실을 노스님에게 알렸으며, 이에 절의 노스님은 인근 백련사 추송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추송스님은 3일동안 차라리 열매를 맺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자 먹구름이 몰려와 뇌성과 함께 때 아닌 비를 무섭게 내려 사람들이 무서워 고개를 숙이자 추송스님과 노스님, 동자승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살이 전등사를 구하기 위해 세 명의 스님으로 변해 왔다고 말을 하였고 그 이후 은행나무는 지금가지 열매를 맺지 않고 있으며, 관가의 탄압도 더이상 받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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