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의 길,맛,멋따라♣/절집 여행

우리나라 유일의 하앙식 구조 법당을 가진 완주의 화암사

들꽃(野花) 2009. 9. 10. 06:05

만약에

만약에 라는 단어가 떠오르게 하는 완주군의 불명산에 있는 화암사를 찾았다.

전날 많은 비가 내려 처음부터 여행이 어렵겠구나 했으나 막상 출발하고 보니 날씨가 너무나 청명하고, 계곡에는 물이 넘쳐 산사로 가는 길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왜 만약에라고 하는 지 설명을 해야지.

 

불명산의 화암사 가는 길은 산사에 가서 알았는데 두가지 길이 있었다.(두 길이 있다는 것은 도착하여 알았다) 

첫번째 가는 길은 방금 우리네가 올라온 길이요, 두번째는 차가 올라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깊은 산속에 어떻게 차가 올라가나 했더니 그것도 승용차였다. 그러면 무릎이 불편하신 장모님을 모시고 올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을 남기게 하였다. 그런데 만약에 차로 올라 왔다면 계곡에서 폭포를 이루며 흘러내리는 것을 볼 수 있을까, 그냥 산사만 간단히 보구 되돌아갔다면 얼마나 아쉬움이 남겠냐 말이다.

 

전주에서 대전으로 가는 국도에 차를 올려놓고 간다.

하나 국도에서의 이정표는 친절히 안내가 되어 있으나 첫번째 마을에서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정표가 없다.

이런 경우는 많은 경험에 의하면 아무 생각없이 그냥 직진하면 된다. 하나 여기서 실수한다.

직진하여 가다보니 마을안쪽길과 더욱이 마지막엔 비포장길이 나온다. 지도에는 틀림없이 포장길인데 잘못 들어온것이다. 하나 물어볼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방법은 삼거리까지 되돌아가서 가보지 않은 좌측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좌측길로 들어서 얼마 안가니 사람들이 보인다. 차를 세운다.

"저기요, 이길이 화암사 가는길 맞습니까?

"예 계속가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계속간다. 오로지 앞으로만, 포잘길 끝에 오니 차량이 주차되어 있는게 보이고 작은 안내판이 오른쪽에 있다.

맞다. 화암사!

앞쪽에는 비포장길이 있는데 저길은 뭐하는 길일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사람도 없고 해서 하차하여 안내판을 보니 찻길은 안내판에 어디에도 없고 여기서 걸어가는 이정표만 있다.

이렇게 말이다. 

 

 

 

적당한 산책거리와 계곡에는 물이 넘쳐흐르고 삼림욕하기에 딱이다.

 

 

 

 

 

이런 글도 보인다.

- 마름을 치유하는 길-

  '마음의 짐은

   내려놓으시고

 

   이 곳의 맑고 청량함만

   몸과 마음가득

   담아가세요'

 

 

 

계곡이 폭포를 이루고 있다.

장모님이 무릎이 불편하셔 여기서 쉬시고, 우리 가족만 계속해서 산사로 올라갔다.

 

 

 

산사로 가는 길이 밤새 내린 비로 인해 물이 넘쳐나고 있다. 

 

  

147개의 철계단으로 땀좀 흘리면서 올라가야 한다. 이 철계단에는 시와 그림들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이 힘들이지 않고 올라가게하여 산사를 찾게하는 센스를 보이고 있다.

 

 

  이길을 화암사중창비에 보면 “바위벼랑의 허리에 너비 한 자 정도의 가느다란 길이 있어 그 벼랑을 타고 들어가면 이 절에 이른다. 골짜기는 가히 만 마리 말을 갈무리할 만큼 넓고 바위가 기묘하고 나무는 늙어 깊고도 깊은 성(深廓)이다. 참으로 하늘이 만든 것이요 땅이 감추어둔 도인의 복된 땅이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위의 사진 내용을 보면 시인 안도현이 화암사를 두고 읊은 시 「화암사가 있는 풍경」으로 일부 내용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어!'

'또 공사네'

왜 일까? 금년에는 사찰 여기 저기서 공사가 한창이다. 대표적으로 강진의 무위사도 그랬고, 영암의 도갑사, 나주의 불회사는 사찰진입로 공사가 있었고, 아직 글을 올리지 않았으나 오대산의 상원사도 그랬다.

작년에 갔던 안동의 봉정사도 생각이 난다. 거기도 공사중이었지.

 

 

 

 

 

  화암사의 정확한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초의 기록인 「화암사중창비문」에 따르면 신라시대인 7세기 경 원효(元曉)ㆍ의상(義湘) 두 스님이 이곳에 절을 짓고 수행했다고 한다. 중창비에 전하는 창건내력은 다음과 같다.

 

  옛날 신라의 원효와 의상 두 조사께서 중국에 유학을 갔다가 도를 얻고 귀국하여 이곳에 주석하였다. (두 분은) 사찰을 짓고 머물렀는데, 절 법당의 주불인 수월자용(水月姿容) 보살은 의상스님이 도솔산에 수행하러 갔다가 친견했던 지용과 등신(等身)으로 조성한 원불(願佛)이었다. 절의 동쪽 고개에는 원효대(元曉臺)라는 법당이 있고 절의 남쪽 고개에는 의상암(義湘庵)이라는 암자가 있으니, 모두 두 분 조사께서 수행하시던 곳이다….

 

 

 

 

보물 제663호인 극락전

 

 

  화암사는 입지가 험난하여 사람들의 접근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고 은둔자마냥 유유자적하고 있었는데, 화암사가 은둔자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사람들의 발길을 허용한 것은 화암사 극락전이 오늘날 고건축분야에서 해방 이후 최대의 발견이라는 '하앙구조'를 지닌 건물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하앙(下昻)’이란 일종의 겹서까래로, 처마길이를 길게 뺄 수 있도록 고안한 건축 부재인데 그동안 중국과 일본에서만 발견되고 우리나라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단지 고려시대의 청동탑 모형 등에서만 확인되었을 따름이었다. 이를 빌미로 일본학자들은 한국을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일본으로 하앙법이 직수입되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렇듯 1970년대 화암사 극락전에서 발견된 하앙식 구조는, 일본에는 충격이었고 한국에는 더없이 반가운 발견이었던 것이다.

 

 

 

 

 

 

 

 

 

꽃비가 내린다는 이름을 가진 우화루의 모습으로 보물 제 662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암사 중창비

 

 

 

 

화암사에 전해지는 설화가 있기에 소개한다.

 

신라의 어느 왕에게 남달리 예쁘고 마음씨 또한 고운 딸 연화(蓮花) 공주가 있었는데, 어느날 공주가 병에 들어 점점 병세가 심해져만 갔다. 훌륭한 의사와 좋다는 약을 다써봤지만 효험이 없어, 왕실은 물론 온백성들의 근심이었다. 얼굴이 야위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연화공주는 한 달이 다 되도록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왕은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 않은 딸의 마지막 소원을 빌기 위해 가까운 절에 나가 정성껏 불공을 드렸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 겨울날에 불공을 나간 왕은, 추위에 떨며 대궐로 돌아와서 깊은 잠에 빠졌다가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 나타난 것은 왕이 다니던 절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이었다. 얼굴에 연꽃 같은 환한 웃음을 머금은 부처님은 자비로운 모습으로 왕에게 말했다.
“너의 갸륵한 불심에 감동하여 공주의 병을 낫게 할 것을 알려줄 테니 그리 알라.”


부처님은 왕의 앞에 조그마한 연꽃 한 송이를 던져준 뒤 사라졌고, 왕은 조심스럽게 꽃을 받아쥐고 기뻐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왕은 곧 신하들에게 명하여 연꽃을 찾도록 하였으나 추운 겨울에 연꽃을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전국에 연꽃을 찾으라는 명을 내리고 며칠이 지난 뒤, 지금의 완주군 운주면 깊은 산봉우리 바위 위에 연꽃이 있다는 연락이 궁으로 올라왔다. 겨울에 연꽃이 피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연못이 아닌 산중의 높은 바위에 피어 있다는 것은 더욱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처님이 내려준 꽃이라 생각한 왕은, 신하들에게 조심하여 꽃을 가져오도록 명령했고, 힘겹게 산으로 올라간 신하들은 꽃을 꺾기 전 잠시 바위 뒤에 숨어서 연꽃을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이런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니 여기 숨어 이곳에서 누가 이 연꽃을 키우고 있는지 알아보자.’

 
한참이 지난 후 산 밑의 연못 속에서 갑자기 용 한 마리가 솟아오르더니, 입으로 연꽃에 물을 뿌려준 뒤 다시 연못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두려움에 떨던 신하 중 담력이 센 몇 명이 연꽃을 꺾어왔고, 이를 먹은 공주는 씻은 듯이 나아 여름아침의 연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왕과 왕비를 비롯한 만백성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며, 부처님의 은덕에 감화한 왕은 불심이 더욱 깊어져 연꽃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절을 짓고 부처님을 모시게 했다. 절의 이름은 ‘바위 위에 꽃이 피었다’는 뜻에서 ‘화암사(花岩寺)’라 하였다.

- 전통사찰 관광정보 내용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