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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연계체험] '왕에게 가다' 경복궁에서의 왕의 정전영역(근정전)

들꽃(野花) 2010. 12. 6. 11:39
[세계유산연계체험] '왕에게 가다' 경복궁에서의 왕의 근무공간(근정전) 

'왕에게 가다'

 

경복궁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경복궁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먼저 어디로 가야하나요?

궁궐의 문

광화문으로 갑니다.

흔히 보는 광화문 사진은 정면에서 찍은 사진이 많지만, 과거의 궁궐 정문과 현재의 정부청사 이렇게 신구의 모습을 담아보는 것도 괜찮답니다.

앞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광화문의 자태는 아름답고 웅장합니다.

 

 

경복궁은

조선시대의 정궁으로 태조 이성계가 1392년 조선을 건국한 다음 즉위 3년에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세운 궁궐이다.(사적 제117호)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경복궁의 경내는 150,000평으로 네모 반듯한 터를 이루고 있는데 북쪽에는 북한산 줄기인 북악산을 중심으로 좌우에 낙산과 인왕산이 경복궁 터를 감싸주고 있다. 궁궐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명당수가 영제교를 지나 청계천과 한강으로 흐르도록 했고, 남쪽은 남산과 관악산을 마주한 명당 터이다.

경복궁의 담장은 남쪽으로는 정문인 광화문, 동쪽에는 건춘문, 서쪽에는 영추문, 북쪽에는 신무문이 있다.

 

광화문의 삼문 중 가운데에서 바라보는 궁궐의 모습

 

흥예문

 

근정문은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의 남문으로 좌우에 복도 건물인 행각이 둘러싸고 있다. 조선 태조 4년(1395) 경복궁을 세울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세우면서 같이 지은 것이다.

근정문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며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들의 형태가 날카롭고 곡선을 크게 그리고 있어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행각은 근정전의 둘레를 직사각형으로 둘러 감싸고 있는데 원래는 한 칸 복도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2칸 복도로 만들었다. 양식과 구조는 간결하게 짜여 있으며 남행각이 연결되는 곳에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이 있고 북행각 가운데에 사정문(思政門)이 있다. 동·서쪽으로는 각각 밖으로 돌출한 융문루(隆文樓)·융무루(隆武樓)가 있다. 벽에 만든 창의 형태는 사각형의 모서리를 사선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시대 왕궁 정전의 남문 중 하나 밖에 없는 2층 건물로, 위엄을 갖춘 궁궐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보물 제812호)

 

어구의 중앙에 있는 영제교

어구와 영제교는 근정문에서 이루어지는 왕과 신하들의 조회 시에 신하들이 도열할 위치를 구별하는 경계이기도 하다.

영제교를 중심으로 북쪽에 2품 이상의 관원이 서고, 남쪽에 3품 이하의 관원이 정렬하였다.

 

근정문에서는 왕과 문무백관이 조참으식을 행하였다. 또는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단종은 근정문에서 즉위를 한 첫번째 왕이다.

 

백악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 즉, 금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도록 한 어구

어구는 경복궁 뿐만아니라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에도 있으며, 고려궁궐, 중국의 궁궐, 베트남의 궁궐에도 있어 동아시아 지역의 궁궐들이 갖추어야 할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어구의 좌우측에는 금천을 지키는 천록이 2마리씩 네마리가 있다.

이 천록은 경복궁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조선시대 뛰어난 조각 작품의 하나이다. 한마리는 이상하게도 등에 구멍이 나 있고, 또 한마리는 없어져 2001년 영제교를 복원할 때 새로 조각하여 짝을 맞춰 둔 것이다.

 

근정전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태조 3년(1394)에 지었으며, 정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하였다. ‘근정’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다시 지었는데, 처음 있던 건물에 비해 많이 변형하였다.

앞면 5칸·옆면 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여진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며 그 형태가 화려한 모습을 띠고 있다. 건물의 기단인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훌륭한 솜씨로 12지신상을 비롯한 동물들을 조각해 놓았다. 건물 안쪽은 아래·위가 트인 통층으로 뒷편 가운데에 임금의 자리인 어좌가 있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병풍을 놓았고, 위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정승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햇빛을 가릴 때 사용하였던 고리가 앞마당에 남아 있다. 근정문 좌우로는 복도 건물인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국보 제223호)

 

 

 

 

근정전에 오르는 하월대 답도와 상월대 답도에 새겨진 봉황문과 당초문

 

근정전의 일월오악도

 

근정전 천장의 철조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