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제1대 태조 - 건원릉(태조)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 능제는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현릉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시대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석물의 조형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거의 따르고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들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높고 웅장한 봉분의 아래 부분은 다양한 문양을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다. 병풍석에는 열 두 방향의 악재로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왕을 지키는 영물들로, 밖을 향하여 언제든지 방비할 수 있는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다. 한 단계 아래쪽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그보다 더 아래쪽으로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다.
1408년(태종 8) 태종은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조성하였다. 태조는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그해 6월 12일 검교 판한성부사 유한우, 전 서운정 이양달, 영의정 하윤 등이 원평, 봉성, 행주 등의 길지를 후보지로 내세웠으나 채택되지 못하였고, 6월 28일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의 검암에 산릉지를 정하였다.
7월 5일에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하여 7월 말을 기하여 산릉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고 석실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는 9월 7일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에 나아가 견전례를 행하고 영구를 받들어 발인하였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해두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361년(고려 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 때이다. 그는 개경이 함락되자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 전공을 세움으로써 이름을 떨쳤다. 그 후로도 함흥평야에서 원나라 장수 나하추를 격파하는 등 다양한 공을 세워 나라의 두터운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 무렵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는 통보를 보내오자, 고려 조정은 요동을 정벌하여 이를 견제하고자 했고, 최영 중심의 찬성파와 이성계 중심의 반대파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1388년(고려 우왕 14) 요동정벌이 단행되었는데, 이성계는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하였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왕으로 등극한 다음해에는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며,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몰두하였다. 명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사대정책을 썼고, 숭유배불 정책을 내세웠으며,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아들들의 권력 다툼이 화를 불러일으키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다.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다가 1408년(태종 8) 5월 24일 창덕궁 별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심부름을 보냈는데 감감무소식인 사람’을 일컬어 흔히 함흥차사라고 한다. 함흥차사는 원래 태종이 ‘함흥에 있는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보낸 사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훗날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국을 어지럽히자, 태조는 왕위에서 물러나 한양을 떠났다. 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로는 문안을 위하여 태조에게 차사를 보냈으나, 그 때마다 돌아오지 않아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태종이 차사를 보낼 때마다 태종에게 몹시 화가 난 이성계가 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고 하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에 대한 분노를 삭히지 못한 태조는 경기도 양주 땅에 있는 회암사와 강원도 오대산, 함경도 안변, 항주 등으로 다섯 번이나 홀연히 한양을 떠났다. 이때마다 태종은 이성계에게 차사를 보내어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돌아올 것을 종용하였는데, 그 중에서 희생된 사람은 마지막 차사인 박순과 내관 노희봉 뿐이며, 이들도 이성계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반란군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함흥차사에 관한 이야기는 후세에 와서 호사가들이 태종과 태조의 갈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부풀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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