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제14대 선조 - 목릉(선조,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
선조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1552년(명종 7) 11월 11일 한성 인달방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바르고 용모가 빼어나 순회세자를 잃고 후사가 없었던 선왕 명종의 사랑을 받았다. 처음에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1567년(명종 22) 명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해 7월 3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매일 경연에 나가 토론하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여 제자백가서를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선조는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이황, 이이 등 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다.『유선록』, 『근사록』, 『심경』, 『소학』, 『삼강행실』등을 편찬케 하여 유학을 장려하는 한편,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에게 증직하는 등 억울하게 화를 입은 사림들을 신원하고, 그들에게 화를 입힌 남곤 등의 관작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했다.
그러나 세자책봉 문제 등을 둘러싸고 정국을 주도하던 사림들 사이에 당쟁이 극심해졌으며, 국력이 쇠약해져 국방대책을 세우지 못하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에 이어서는 정유재란이 일어나 두 차례에 걸친 7년 동아의 전쟁을 치르며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선조는 전후 복구작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선조는 선왕 명종의 조카이다. 명종은 어린 나이의 순회세자를 잃고 자식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여러 왕손들을 궁궐에 자주 불러,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곤 했다. 그 중에서도 선조(당시 하성군)를 유난히 아껴 그를 따로 불러 학문을 시험해보기도 하고, 한윤명, 정지연 등을 따로 뽑아 그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하루는 명종이 여러 왕손들을 궁중에서 가르칠 때 익선관을 벗어 왕손들에게 주며 써보라고 하였다.
“너희들의 머리가 큰가 작은가 알려고 한다.” 명종은 이렇게 말하며 여러 왕손들에게 익선관을 써보게 하였다. 다른 왕손들은 돌아가면서 익선관을 써보았지만, 제일 나이가 어린 선조는 머리를 숙여 사양하였다
“이것을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겠습니까?”
선조는 이렇게 아뢴 뒤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도로 가져다 놓았다. 이를 본 명종은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그에게 왕위를 전해줄 뜻을 정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의인왕후는 반성부원군 박응순의 딸로 1569년(선조 2)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하였다.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침착하고 자애로운 면모를 지녔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후궁의 자식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폈다. 특히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남달리 총애하여 마치 자신이 낳은 친아들처럼 대해주었고, 훗날 그가 세자의 자리로 오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광해군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에 정세는 안정을 찾아갔으나, 의인왕후는 피난길에서 얻은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46세의 일기로 황화방 별궁에서 승하하였다.
선조 33년 6월 24일조의 실록에는 “별로 아픈 곳은 없으나 음식이 먹고 싶지 않고 밤엔 잠을 잘 수 없으며 온 몸이 나른하여 앉으나 누우나 편안하지 못하다. 음식을 대하면 구토부터 먼저 나고 숨이 가쁘며 목에서 가르릉 거리는 소리가 조금 나고 맥은 부하여 한 번 숨 쉬는 동안 7번이나 뛴다. 아마도 원기가 부족한 탓으로 비(脾), 폐(肺), 심(心) 세 기관이 병난 듯하다.”는 의인왕후의 병세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자식이 없던 그녀를 무시하던 선조는 “중전의 목숨을 이미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나는 실로 망극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밖에서 속히 일을 준비하도록 하라.”라고 빈청의 대신들에게 전교하며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였다고 한다.
선조 때 유학자들의 글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왕비의 원찰 아닌 곳이 없다.”는 통탄의 목소리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의인왕후가 이름 난 기도처마다 자신의 원찰을 설치하고, 아이를 낳기를 발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전국의 명산대찰에 원찰을 설치하고 부처님께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건봉사, 법주사 등 여러 사지(寺誌)에는 그녀가 보시한 기록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자식을 절실하게 바랬던 그녀는 불교에 의지하여 평생 불경과 염주를 가까이 하고 살았으며 궁중의 여인들은 그녀를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라 불렀다.
의인왕후는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은 임해군과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돌보았다. 선조실록에는 “의인왕후가 후궁들의 자식을 지나치게 예뻐하여 선조가 장난삼아 질책하면 아이들은 왕후에게로 도망가 숨곤 했는데, 이때마다 왕후는 곧 치마폭을 당겨 그들을 가려주곤 했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이는 의인왕후가 자신의 배로 나은 자식은 아니었을지언정 선조의 모든 자식들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사랑해주었음을 알려준다.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로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이다. 1602년(선조 35) 19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이때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실권자였던 유영경(柳永慶)은 적통론에 입각하여 적출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고 대북정권이 들어섰는데 이들은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하여 선조의 첫째 왕자인 임해군(臨海君)을 제거하고 이어서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살해하고, 대군의 외조부 김제남을 사사시키고, 인목왕후를 폐비시킨 다음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패륜행위는 결국 정변의 구실을 주게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인목왕후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인목왕후는 그 후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장(長)의 위치에 처하면서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금강산 유점사에 친필로 쓴 『보문경(普門經)』의 일부가 전하고, 인목왕후필적첩이 남아 있다.
1613년(광해군 5) 인목대비 폐비사건을 시작으로 인목왕후의 일대기를 그린 글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 글을 『계축일기』라고 한다.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과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둘러싼 당쟁을 사실적으로 서술하였다. 이 기사문은 인조반정 뒤 대비의 측근 나인이 썼다고 전해진다. 그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윗전(인목왕후)이 애통해하며 대군(영창대군)을 내보내지 못하고 시간을 끌자 금부 하인들이 밀고 들어와 대군을 업고 나갔다. 그 후 한 달 만에 대군 아기는 강화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런데 미리 알려 주지도 않고 늦도록 안부 전하는 사람도 찾아오지 않으므로 윗전께서는 수상히 여기시고 근심하시는 것이었다.
"어째서 오늘은 여지껏 안부도 알려오지 않는고? 필시 무슨 까닭이 있도다. 아무든지 높은 데 올라가 궁 밖 길의 동정이나 살피고 오너라."
명령을 받고 한 사람이 전에 침실로 썼던 다락 근처에 올라가 바라보니 사람들이 돈의문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성 위로 올라가 굽어보니 화살을 차고 창과 칼을 가진 사람이 수없이 많고 말을 탄 사람도 많았다. 이제 죽이려나 보다 하고 내려와 바깥사람들이 길 닦는 곳이 있기에 거기 가서 물어 보고서야 대군을 강화로 옮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관적 관점에서 쓰였으나, 조선 중기의 궁중에서 전개되는 풍속 및 생활상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당시 치열한 당쟁의 이면을 이해하는데 보조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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