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충북 보은읍 성족리 산16번지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을 아십니까?
동학하면 생각나는 사람, 전봉준, 녹두장군 정봉준이라고만 알고 있고, 그 지역도 전라도의 고부라고, 얼마전 전봉준의 생가터를 찾아갔던 기억이 나는데 왜 보은에 동학과 관련된 기념공원을 만들었을까?
충북 보은이 동학농민혁명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동학은
1860년 4월 수운 최제우가 경상도 경주 땅에서 창도한 종교로,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이 처한 여러가지 상황을 그대로 반영되었다. 동학교리에는 유불선의 주요 내용이 바탕이 되고, 전통 주문과 부적 등 민간신앙의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회 내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시대 이념이 들어가 있고, 외세에 대한 단호한 배격주장이 반영되어 잇었다. 따라서 쉽게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혁신 지식인을 통하여 각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갈 수 있었다.
동학이 커지면 왕조정부에 정면 대항할 수 있다는 종교단체로 위기의식을 느껴 1864년 봄 세상을 현혹시키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으로 교조 최제우를 붙잡아 처형하고 말았다. 교조가 처형된 뒤 동학은 사교로 간주되었다. 동학교도들은 관헌에 붙잡혀서 처벌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용담에 모이던 교도들은 산산이 흩어졌다.
이때 태백산으로 피신하여 화를 모면한 제2세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소백산맥 양편 지역의 험준한 산골 마을을 거점으로 여러 군현을 전전하며 은밀히 포교해 나갔다.
교세를 확대시켜 나간 동학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이래 구미 열강과 국교를 확대한 이후 더욱 교세를 확대시켜 나가게 된다. 1890년대 들어와 교세는 확대되지만 사교로 간주하는 지방관아의 탄압을 계속되자 교조의 원한이 풀리면 자연히 동학을 사교로 간주하는 금지조치가 해제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동학에 대한 탄압에 더욱 심해지자, 교단에서는 왕조정부에 교조의 신원을 호소해서 포교를 공인받아야 하겠다는 결의를 굳히게 되었다. 이에 1893년 정월 보은군 속리면 장안마을(장내리)에 대도소를 정하여 교단의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보은의 장안마을은 이 때부터 각처의 교인들에게 동학교단의 본부로 알려지게 되었다.
동학혁명에서 전라도를 남접, 충청도를 북접이라 하였으며 북접의 접주는 손병희가 맡게 되어 남접과 함께 싸웠으나 패퇘하였고, 보은의 북실마을전투에서 2,500여명의 동학군이 사살되는 것으로 동학혁명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보은 문화원 자료 인용)
이제야 왜 이곳에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겟다.
어쩜 이곳을 기념공원이아니라 추모공원으로 해야할 것 같다.
주요시설로는 기념탑, 집회광장, 산책로돌성, 하늘길계단 등이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탑
공원입구에 세워놓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안내판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게 된 것을 설명해 주는 조각상
경복궁의 점령한 일본군의 모습을 설명
좌측에는 충청도, 경기도, 평안도는 청일전쟁의 무대로 변해버려 도시가 파괴되고 마을이 불타는 등 엄청난 피해을 입고, 외국 군대가 서로 싸우는 것을 지켜보며 참혹한 시기를 겪어야 했음을 설명
우측에는 보은의 동학도들이 의병 봉기를 계획하는 것을 묘사
공원에 만들어 놓은 장승들
성곽
새야 새야 파랑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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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군 추모가
꼭 지켜야 할 동학의 덕목
첫째, 집안의 모든 사람을 한올님같이 공경하라.
며느리를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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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제가 있던 당시 이런 획기적인 덕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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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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