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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답사/남양주] 남양주 광해군묘 - 사적 제363호

들꽃(野花) 2013. 5. 10. 06:00

남양주 광해군묘 (南楊州 光海君墓) / 사적 제363호

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59외

설 명 :

광해군묘는 조선 15대 임금이자 두 번째 폐위 임금인 광해군(光海君)(재위 1608∼1623)과 그의 부인 문성군부인 유씨(文成郡夫人柳氏)의 무덤이다. 쌍분인데, 오른쪽이 문성군부인 유씨의 묘이다. 연산군묘와 동일하게 군묘(君墓)의 형식으로 간소하게 조성되어 있으며, 두 봉분에 각각 비석과 상석이 있고. 장명등 그리고 망주석과 문석인 1쌍이 설치되어 있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恭嬪 金氏)의 소생(所生)이다. 선조(宣祖) 8년(1575)에 태어났으며 휘(諱)는 혼(琿)이다. 형(兄)인 임해군(臨海君) 대신 세자(世子)로 책봉되고 1608년 즉위(卽位)하였다.

 

즉위초에는 당쟁(黨爭)의 폐를 알고 당쟁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이에 휩쓸려 임해군(臨海君), 영창대군(永昌大君), 김제남(金悌男)(인목대비(仁穆大妃)의 부(父)) 등을 역모(逆謀)로 몰아 죽이고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경희궁(慶熙宮))에 유폐시키는 등 패륜행위(悖倫行爲)가 많았다. 특히 영창대군을 방안에 가둔채 불을 때어 질식사시킨 일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에 충분했다.

 

정치(政治)도 문란해져서 이귀, 김류, 최명길, 김자점 등에 의해 폐위(廢位)되고 능양군(綾陽君)을 받들어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광해군은 대궐 뒷문으로 피신하여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서 체포되어 서인(庶人)으로 내리는 동시에 강화(江華)로 귀양보내졌다.

 

그후 제주도로 유배지가 옮겨진 광해군은 그곳에서 67세의 천수를 다하고 1641년(인조 19)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 때문에 1643년(인조 21) 제주도에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위치한 지금의 묘소로 옮겨졌으며 건너다보이는 곳에 어머니의 묘소인 성묘가 자리한다.

 

그러나 광해군(光海君)은 재위(在位) 15년간(1608∼1623) 서적(書籍)을 편찬 간행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의 사고(史庫)를 정비하고 성지(城址), 궁궐(宮闕), 병기(兵器)를 수리(修理)하였으며 호패(號牌)를 실시하는 등 내치(內治)와 국방정비(國防整備) 및 외교(外交)에 힘을 기울였다.

 

문성군부인유씨(文成郡夫人柳氏)는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유자신(柳自新)의 여(女)로 선조(宣祖) 31년(1598)에 태어났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卽位)하자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고 광해군과 같이 폐위(廢位)되어 강화(江華)로 함께 유배(流配) 당하였으며 유씨(柳氏)는 이곳에서 인조원년(仁祖元年)(1623년) 10월 8일 사망하였다. 동년(同年) 10월 30일 양주군(楊州郡) 적성동에 장사(葬死)했다가 광해군사후(光海君死後) 같은 묘역(墓域)에 천장(遷葬)하였다.

 

기록은 광해군묘비명(光海君墓碑名)이 '광해군지묘(光海君之墓)'이고 비후면(碑後面)에 '신사칠월초일일병졸어제주명철조삼일(辛巳七月初一日病卒於濟州命輟朝三日)'이라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