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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답사/천안]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 - 사적 제230호

들꽃(野花) 2013. 3. 26. 09:10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 (天安 柳寬順 烈士 遺蹟) / 사적 제230호

소재지 : 충남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338-1

 

  3·1운동 때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유적으로, 생가와 매봉교회, 유적비 그리고 봉화를 올렸던 봉화터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대대로 내려오는 선비가문에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6년에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시위에 참가하였고, 일제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에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에 시위운동을 벌여 열사의 부모를 비롯하여 19명이 죽고 30명이 부상당했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유열사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20년 10월에 순국하였다. 시신은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무덤을 잃어버렸다.

 

  천안시에서는 유관순의 애국정신을 길이 추모하고 3·1운동의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72년에 사당을 세우고 열사의 초상을 모셨다. 봉화대와 봉화탑을 건립하여 매년 3월 마지막날에 봉화를 올림으로써 그 날을 기념하고 있다.

 

 

유관순열사의 동상과 태극기

 

병천읍에서 들어오는 열사의 거리

각종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어 시간을 가지고 둘러보는 것도 좋다. 

 

순국소녀 유관순열사 초혼묘봉안기념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비다.

 

기념관

 

유관순열사 추모각

 

동상

 

 

나라를 잃은 설움에 얼마나 많은 날들을 아파했을까.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치는 어린 소녀의 애끓는 소리가 들리는가.

 

 

추모각으로 오르는 길 좌우에는 태극기가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빛나고 있다.

 

 

추모각

유관순 열사의 애국정신을 길이 추모하고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의 빛난 얼을 기리기 위해 1972년에 건립하였고, 1986년 15평에서 26평으로 증축하였다.

화강석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 목조건물로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정면에 삼문을 두었다.

 

유관순열사 영정

영정은 전통영정기법으로 제작된 전신좌상(비단 바탕에 채색, 120cm x 200cm)으로 윤여환 화백에 의해 제작되었다.

영정 속 유열사의 자세는 만세운동을 벌이기 직전에 나라를 걱정하는 표정과 의기에 찬 모습으로 이화학당 교실에 잠시 앉아 태극기 쥔 손을 무릎에 올려놓은 모습으로 설정하였으며, 흰색 치마저고리, 갖신 등 복식과 마루바닥 등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사실성 있게 재현하였으며, 2007년 2월 28일에 봉안되었다.

 

가마는

1986년 8월 15일 월전 장우석 화백이 그린 유관순 열사 영정을 봉안할 때 사용하였던 가마이다.

영정을 가마에 모시고 8명의 장정들이 가마를 어깨에 메고 추모각까지 운반했다.

 

 

추모각에서 바라보는 병천읍내

 

 

추모각 현판은 갈물 이철경 선생이 필체이다.

 

 

 

추모각을 둘러보고 초혼묘와 봉화탑을 보기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추모각 좌측에 있는 매봉약수로 수질검사표를 확인해보니 먹을 수 있다고 하여 한 모금 마신다.

 

 

 

초혼묘 가는 길에 이와 같은 비에 새겨진 글들을 만날 수 있다.

 

태양이 타오르고 달이 차오를 때

마침내 여물지도 못한 인동초여

혼들림 없던 불꽃의 외침을 사라지지 않았다.

매봉의 굵은 횃불이 하늘로 치솟았다.

겨레와 민족의 앞날을 밝혀주는

평화의 부기가 삼천리에 굽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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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혼묘로 올라가는 길

 

 

초혼묘

유관순 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1919년 4월 1일 3천여 군중이 참여한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운동인 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 최종 판결에서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끊임없는 옥중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하다가 갖은 폭행과 고문에 못이겨 1920년 9월 28일 순국하였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 주선으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열사의 유택은 흔적없이 망실되었다.

이에 열사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1989년 10월 12일 초혼묘를 봉안하였다.

 

 

 

 

초혼묘 전경

 

 

초혼묘를 둘러보고 봉화탑을 찾으로 길을 나선다.

 

 

유관순 열사 봉화지

 

 

 

이곳은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1919년 4월 1일의 거사를 각지에 알리기 위해 3월 31일밤에 봉화를 올렸던 곳이다.

당시 이 봉화를 신호로 목천, 천안, 안성, 진청, 연기, 청주 등 각지의 산봉우리 24곳에서도 봉화가 올려졌다.

거사 당일은 이른 아침부터 그의 동지들이 아우내 장터로 모여 감춰두었던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오에는 유관순열사가 장터 높은 곳에 올라가 독립을 호소하는 비장한 연설을 하자 수 많은 군중들이 일제히 독립만세을 불렀다.

 

본 유적지를 길이 보존하고, 숭고한 뜻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1977년 봉화대와 봉화탑을 건립하였다.

매년 2월 말일 봉화제를 개최하여 유관순열사와 만세운동을 기념한다. 

 

봉화터에서 바라보는 아우내 장터

 

 

이은상님이 쓴 유관순열사 봉화탑 찬가가 있어 적는다.

 

정의의 상징 이 나라의 딸 류 관순

그대 매봉에 올라 높이 들었던 봉화

여섯 고을 스물 넷 산봉우리마다

내일을 약속하며 같이 타오른 봉화를

이 길로 가야 자유가 있고

이 길로 가야 평화가 있고

오직 이 길만이 사는 길이라고

애타게 일러준 거록한 봉화였네

 

그대 손에 들렸던 그 정열의 봉화

민족의 끓는 피로써 기름을 삼았기에

악마의 풍우 속에서도 꺼질 리 없었고

오늘은 역상의 제단에 이리도 화사로이

무궁화 꽃송이처럼 피어 오른 봉화라

영원히 겨레의 가슴 가슴에

타오르리라 타오르리라

-일천구백칠십칠년 칠월 이은상 글, 김기승 씀

 

 

 

 

 

봉화탑을 내려와 순국자 추모각을 찾아간다.

 

 

 

순국자 추모각

이곳은 호서지방 최대의 항일 운동인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으로 순국하신 47인 선열들의 위패를 모신곳이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김구응, 조인원, 이백하 등이 장터에 모인 3,000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켰으며, 만세운동 당시 일본군의 무자비한 공격에 유관순 열사의 부모를 비롯해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셨고 나머지 분들은 옥고를 치루거나 부상을 당해 순국하셨다.

순국하신 분들중 36인은 신원이 확인되었으나 11인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

 

 

 

순국자 명단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유관순열사 기념관

 

 

타임캡슐

2003 4.1  ~ 2102.4.1

 

 

기념관 내부

 

 

 

 

 

 

 

 

 

 

 

 

 

 

 

 

 

 

유관순열사의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기념관에서 학생들에게 해설을 해 주신 분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유관순 열사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순국하신 수 많은 사람들 중 1인이며 독립을 위해 국내뿐아니라 세계각지에서 애쓰다 돌아가신 분들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