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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여행]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진천 길상사

들꽃(野花) 2013. 8. 18. 05:00

[진천여행]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진천 길상사

 

 

진천 길상사 (鎭川 吉祥祠) / 충청북도 기념물 제1호

소재지 :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508

 

진천의 길상사라

여기는 어디일까? 흔히들 'OO사'라 하면 우선 사찰을 떠올린다.

나도 처음 진천의 문화재를 검색하면서 길상사, 여긴 어떤 사찰일까? 하고 궁금해 했었다.

그러나 문화재 내용을 확인하여 보니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상사를 찾은 날

 

 

 

 

  진천 길상사는 삼국통일의 주역이였던 김유신(595∼673)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김유신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고, 무열왕 7년(660) 상대등이 되었다. 그 뒤 중국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하고 삼국통일(676)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장군은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때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追封)되었고, 일찌기 탄생지인 길상산하(吉祥山下)에 김발한(金發翰) 사우(祠宇)에서 춘추(春秋)로 제향(祭享)되어왔다.


  신라와 고려 때에는 장군이 태어난 태령산 아래 장군의 사당에서 봄과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서 관리가 소홀하다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것을 철종 2년(1851) 박명순(朴命淳) 등이 백곡면 가죽동에 ‘죽계사’를 세워 백파 조감 선생과 같이 장군의 영정을 모셨다.


  고종 1년(1864)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는데 그 후 백암리 소흘산하(所訖山下)에 서발한(舒發翰) 사당(祠堂)을 중건(重建)하여 제향하였는데 1922년 대홍수로 사우가 무너지매 1926년 현 위치인 도당산성(都堂山城) 안에 김만희(金萬熙)의 주선으로 길상사를 재건하였다. 6·25동란으로 사우가 상하여 중수한 바 있으나, 1976년 사적지 정화사업으로 길상사를 중건하여 장우성(張遇聖) 화필(畵筆)로 영정을 마련하고 흥무전(興武殿)에 봉안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이곳에는 장우성이 그린 그의 초상화와 흥무전, 흥무대왕신성비 등이 있다.


 

 

 

외삼문의 현판엔 길상사라고 적혀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길상사의 여기저기를 사진찍으면서 계단을 올라 외삼문에서 청소를 하는 분을 만났다.

자기를 진천군 문화관광해설사 라고 소개를 하면서 관리사무소에서 설명을 해주시겠다고 한다.

 

 

 

 

 

관리사무소에서 시원한 물한잔을 마시며 '김동열'문화관광해설사님에게 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설명을 듣고 있는 중에 관광객 몇분이 이곳이 사찰아니냐고 묻는다.

한자로 되어있지 않아 절하고 헷갈리는 모양이다.

 

 

여기 오기 전에

김유신장군 탄생지와 태실을 보고 왔노라고,

그중에 태령산 정상에 있는 태실을 찾아갔다왔노라고 하니 놀라신다.

이 무더위에, 그리고 탄생지에서 올라가는 길은 계단길이어서 자기는 그리로 한번도 가지 않았다고

어떻게 그쪽으로 올라갔냐고 하면서 놀라신다.

 

 

 

만노군 태수로 부임한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과 갈문왕 입종의 손녀 만명과의 사랑이야기를 들었고

김유신장군의 이야기도 듣게 되어 좋았다.

책이라든가, 안내판이라든가 그런것은 읽을 때만 생각나지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데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니 귀가 솔깃하니 좋다.

 

 

 

 

영정이 모셔져 있는 흥무전

 

 

흥무대왕 신성비

 

 

김유신장군 사적비

 

 

장우성 화필로 그려진 김유신장군 영정

 

 

 

 

 

온몬이 땀으로 범벅이 되는 날

시원한 물을 건네주시고 커피도 주시는 등 설명을 하여주신 김동열 문화관광해설사님에게 감사 말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