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여행

[해남여행] 울돌목의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는 전라우수영관광지

들꽃(野花) 2009. 10. 25. 05:52

이곳 울돌목은 해남군 문내면 학동과 진도군 녹진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이곳의 가장 짧은 거리는 323m이며,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20m로 이러한 지형적 여건으로 인해 매우 빠른 급류가 흘러 평균 11.5노트(시속 약 24km)의 물살이 흐르고 있는 곳이다.

 

명량은 급류가 흐르면서 서로 부딪쳐 울며 나는 소리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을 '울돌목이라 부르고 있다.

 

울돌목은 임진왜란 3대 해전 하나인 '명량대첩'이 있었던 곳으로 나라를 지킨 호국성지이다.

 

 전시관에서 바라보는 진도대교와 울돌목의 모습

 

명량대첩은

  1597년(선조 30) 9월 정유재란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명량해협에서 왜군을 쳐부순 싸움으로 이순신이 원균(元均)의 무고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난 뒤, 원균(元均)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 수군과 대전했으나 다대포·칠천곡에서 대패하여 해상권을 상실하였다. 원균의 패전으로 인해 백의종군 중이던 1597년(선조 30) 7월 다시 통제사로 기용되어, 이순신은 패전 후 남은 13척의 전선과 수군을 정비하여 닥쳐올 전투에 대비하였다.

 

  드디어 8월에 왜선 8척이 남해 어란포에 나타난 것을 격퇴하여 사기를 크게 올렸고, 진을 진도 벽파진으로 옮겼다. 9월 7일에는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중 호위적선 13척의 왜선이 또 다시 어란포로 들어오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적선을 격퇴시켰다. 다시 적의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가 들어와 9월 15일에 12척(13척)의 전선으로 이순신은 진지를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옮기고 장병들에게 “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말하고 필승의 신념으로 적의 내습을 기다렸다.

 

  9월 16일 새벽 왜군 함대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명량으로 공격해 와 이순신이 이끄는 12척(13척)의 배와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후퇴의 기색을 보이지 않고 싸워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내도도총)],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등당고호)] 등이 이끄는 왜선 31척을 격파하였고 왜군은 패주하였다.

 

  이 싸움으로 조선군은 제해권(制海權)을 회복하였고, 왜군으로 하여금 서해 진출의 기력을 잃게 하여 왜란의 대세를 마지막 단계에서 꺾이게 하였다.

 

 

 

진도대교와

울몰목을 바라보고 있는 이순신장군의 모습

우리나라에 있는 장군의 동상중 유일하게 칼을 차지 않고 있는 모습으로 이순신장군의 고뇌하는 모습을 그려놓은 것 같다.

 

 

 

병법에 이르기를 전쟁에 임하여

반드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고

살길만을 찾고자 하면 죽는다.

한명의 군사로도 길목을 지킨다면 천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곧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이 명량에서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시

군률에 의해 엄벌 할 것이니

비록, 작은일일 망정 추호도 용서하지 않으리라

 

 - 이순신 난중일기 정유년 9월 15일

 

 

 

若無湖南是無國家(약무호남시무국가)

 

이 글은 충무공이 친필로 가족과 친지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기록한 서간첩(書簡帖)(국보 제76호)의 내용중에서 계사년(癸巳年) 7월 16일에 이순신 장군이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서신중에 있는 것으로 글의 뜻은 '장하다 호남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나라와 겨레가 온전하리오.' 라는 것으로 호남민의 애국을 표현한 글이다.

 

 

 

 

우수영 관광지에서는 그날의 얼을 잊지 않고 축제로 숭화시켜 나라사랑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배롱나무와 진도대교의 모습 

 

울돌목을 지나가는 거북선유람선

 

전망대

 

전시관의 내부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