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의 길,맛,멋따라♣/절집 여행

영조 어머니인 숙빈최씨의 이야기가 전해져오는 담양의 용흥사

들꽃(野花) 2010. 3. 10. 18:17

어제 곡성의 도림사, 태안사, 순천의 송광사, 화순의 야사리은행나무, 서유리공룡발자국화석산지 등을 둘러보고 담양읍내에서 하룻밤을 유하였다.

그러니까.

아침을 먹고 죽녹원을 먼저가나, 아니면 용흥사를 먼저 들려야하나, 고민하다가 담양읍내에서 떨어져 있는 용흥사를 먼저 가기로 하였다.

이곳은 보물 제1555호인 용흥사동종과 용흥사부도군의 문화재가 있는 사찰이어서 이번 여행의 코스에 포함되었다.

 

  용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로 백제 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까지의 연혁이 전하지 않아 절의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본래는 용구사(龍龜寺)라 했는데, 조선 숙종(재위:1674∼1720) 때 숙빈(淑嬪) 최(崔) 씨가 이 절에서 기도한 뒤 영조를 낳자 이후 절 이름을 용흥사로 바꾸었으며, 산 이름도 몽성산으로 고쳐 불렀다. 이 때부터 50여 년간 절이 발전하여 한때 산내 암자만도 7개나 있었고 큰스님도 머무르며 불법을 폈다고 한다.

 

  19세기 말에 의병의 본거지로 쓰이다가 불에 탄 것을 박항래(朴恒來)가 중건하였다. 1930년대에 백양사 승려 정신(定信)이 대웅전과 요사채를 세웠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다시 불에 탔다. 1957년에 중창하고 1970년대에 대웅전을 새로 지었으며, 1990년대부터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숙빈최씨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영조의 어머니 최숙빈은 창평에서 태어난 가난한 농부의 딸이었는데, 온 가족이 장티푸스에 걸려 동네에서 쫓겨나 인적 드문 용구산의 한 암자에서 살게 되었다. 큰딸인 복순(福順, 숙빈최씨의 이름)은 온갖 정성을 다해 부모와 동생들을 간호했으나 효험 없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복순은 암자에서 매일 기도하며 슬픔을 달래고 있었는데, 어느날 꿈에 암자 뒷산 용구산 산신령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네 효심과 불심이 지극하여 좋은 길을 안내할 터인즉, 내일은 이 암자를 내려가 장성 갈재에 가도록 하거라, 그러면 나주목사 부임행차를 만날 것이고 너는 그곳에서 길을 얻을 것이다.”


이상스런 꿈이라고 생각한 복순은 이튿날 산신령의 말대로 갈재에 나갔더니, 정말로 나주목사의 부임행차가 이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복순은 길에 엎드려 목사 만나기를 청하였고, 자신의 처지와 꿈이야기를 말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나주목사 부인 민씨는 얌전하고 영특해 보이는 이 소녀를 데리고 가서 몸종으로 삼았다. 민씨부인은 조선 19대 왕인 숙종의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의 친척이었다. 당시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는 두 딸을 낳았으나 후사 없이 죽고 민유중의 둘째딸이 계비로 들어갔던 것이다. 민비는 왕후가 되고 난 후 궁녀를 모집했는데, 집안인 나주목사 부인이 자신이 데리고 있던 복순을 천거하여 궁중으로 들어가 궁녀가 되었다. 후사가 없던 민씨는 궁인 장씨(張氏)를 후궁으로 맞아들여 장희빈은 2년 만인 1692년에 왕자(경종)를 낳았고, 민왕후는 장희빈의 모함으로 이듬해 폐비되어 안국동에 유폐되었다.

 

한편 궁녀 최복순은 심성이 착하여 민왕후를 잊지 못해 해마다 왕후의 생일날에는 남몰래 생일상을 차려놓고 은혜에 감사하였다. 4년의 세월이 흐른 후 민왕후의 생일날이 되었고, 그날도 복순은 남몰래 생일상을 차려놓고 민왕후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이 정성이 밤늦게 궁내를 순시하던 숙종의 눈에 띄어 이날 밤 숙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로부터 몇 달이 지나 복순의 배가 불러왔고, 소문은 궁녀들의 입을 통해 세도당당하던 장희빈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투기가 심했던 장희빈은 복순을 심문하여 숙종의 자식을 잉태했음을 확인하고, 옹기 속에 가두어 굶겨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복순은 옹기 속에 갇힌 채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숙종은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는데, 궁내 뜰에서 용 새끼 한 마리가 하늘로 오르려다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숙종은 잠에서 깨어나 이상한 꿈이라 여기며 신하를 거느리고 궁안을 둘러보았다. 조용하고 한적한 어느 곳을 지날 무렵 어디선가 여인의 신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고, 옹기를 찾은 신하들이 뚜껑을 열어보니 잉태한 복순이 실신상태로 갇혀 있는 것이었다. 숙종은 크게 놀라 복순이를 꺼내어 보살피게 되었고, 이듬해 복순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20대 왕인 영조대왕이다.

 

영조는 장희빈이 낳은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승하하자, 1724년 왕위에 올라 52년간 임금의 자리에 있었다. 영조는 즉위 이듬해에 어머니 최숙빈이 용구산 산신령의 덕화(德化)를 잊지 못함을 알고, 소녀시절 최숙빈이 지냈던 암자 터에 용흥사를 지어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었다.

 

이후부터 용구산은 산신령이 숙종으로 하여금 영조를 죽음으로부터 구하는 꿈을 꾸게 한 영험한 산이라 하여 몽성산(夢聖山)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전통사찰종합관광정보 참조)

 

여름에 울창하게 보였음즉한 느티나무가 절의 입구에 서있다.

 

석조여래입상

 

 

 

대웅전으로 이곳에는 보물 제1555호인 용흥사동종이 있으나 우리가 갔을 때는 불공을 드리고 있어 법당안에 들어가보지 못하고 와야했다. 

 

보물 제155호인 용흥사동종은
조선시대 주종장(鑄鍾匠) 중 김애립(金愛立), 김성원(金成元) 등과 함께 사장계(私匠系)를 대표하는 김용암(金龍岩)이 주가 되어 1644년에 주성한 종으로, 높이가 102㎝인 이종은 규모도 비교적 클 뿐만 아니라 비례감과 조형성이 뛰어나다. 또한 종 고리로 쌍룡(雙龍) 대신 활력 넘치는 사룡(四龍)을 채용하여 특이함을 보이고, 종신에 시문된 각종 문양의 표현에서도 세련미가 넘쳐 나며, 다른 조선 후기 범종에 비해 뛰어난 조형미와 문양 표현 등의 주조기술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문화재청 자료 참조) 

 

 

 

산신각 

 

 

 

 

 

겨울의 을시년스러운 모습이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용흥사부도군의 시도유형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도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시신을 화장한 후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으로, 용흥사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 자리잡은 이 부도밭에는 7기의 부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모두 비슷한 형식을 하고 있어서, 바닥돌 위로 3단을 이루는 기단(基壇)을 두고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바닥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대체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인 17∼18세기에 걸쳐 세운 것들로, 만든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어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영흥사부도에서 바라본 절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