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여행

[경주문화유산탐방] 여왕의 향기가 가득한 절 분황사

들꽃(野花) 2010. 11. 16. 06:00

여왕의 향기가 가득한 절, 분황사

 

가을이 한창인 10월의 어느날 한통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문화재청의 2010년 우수 정책고객들에게 문화유산 탐방의 기회를 제공하는데 참가여부를 묻는 메일이었습니다.

회사의 일정을 확인하고 신청을 하였는데 얼마후

'축하합니다 문화유산탐방단으로 선정되셨습니다.'라는 반가운 문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경주에서의 2박 3일간의 문화유산 탐방이 시작되었습니다.

전국각지에서, 각계 각층의 문화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경주의 문화재를 탐방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답니다.

 

그 첫번째의 방문지는 여왕의 향기가 가득하다는 신라의 선덕여왕이 세운 분황사입니다.

파란하늘과 뭉게구름에 두둥실 떠있는 화창한 날

그 가을이 짙어져가고 있는 길에서 분황사를 만났습니다.

 

분황사

신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가람터라고 전하는 일곱 곳의 성스러운 절터(칠처가람)중의 하나로 634년 선덕여왕 3년에 용궁의 북쪽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634년에 자장이 당나라로부터 대장경 일부와 불교 관련 유물들을 장식하는 번(幡) · 당(幢) · 화개(花蓋)를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물게 한 뒤 많은 급여를 내리고 재접을 잘 하고 이곳에 머무시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럼 선덕여왕은 이 절의 이름을 왜 분황사라 붙였을까요?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입니다. 왕위에 오를 때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재위 기간에도 국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특히 당 태종은 3년 동안 신라 임금으로 인정을 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애기도 낳지 못하고 여자로서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나 봅니다. 향기 없는 모란꽃을 선물하는것을 보면 말입니다.

 

선덕여왕 재위 시절 많은 외침을 막아내야 했는데 어려운 고비마다 나라를 지키기위해 부처님을 도움을 염원하여 많은 절을 세웠습니다. 분황사도 그 중에 한 절로, 절을 완공한 후에 절 이름을 지어야 했는데 모든 절의 이름은 불교식으로 붙이는데 이곳 분황사 만큼은 독특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향기 분(芬), 황제 황(皇), 절 사(寺), 즉 '여왕의 향기가 가득한 절'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랬을까?

이 절의 이름으로 '나도 향기가 아름다운 여인이다.'라고 나타내고 싶지 않았을까요?

 

1915년 분황사를 수리 할 때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특이하게도 <금바늘, 은바늘, 가위, 실패> 등의 바느질고리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선덕여왕이 세운 황룡사 9층 목탑 심초석에서도 가위, 바늘통, 실패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원래 탑에는 석가모니 사리를 봉안하는데 모든 탑에 사리를 넣은 수 없으므로 나중에는 석가모니의 진리를 담은 경전이나 관련 유물을 봉안하는데 분황사, 황룡사에는 특이하게도 바느질 용품을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출토된 유물이 선덕여왕과 관련된 유물들이라면 여왕도 섬세한 바느질을 할 수 있는 여인을 나타낸것이 아닐까?

 

분황사에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황룡사터의 발굴 때문에 분황사의 입구가 잠시 이쪽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분황사에 들어가는 길 좌우에는 어느덧 단풍이 떨어져 낙엽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가을도 지는구나.

 

어느덧 가을이 저만큼이나 우리들에게 다가왔는가?

보광전 앞에서 멋진 포즈로 사진을 찍는 ???

 

잠시 탑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탑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전탑으로 중국에는 평지에 돌이 귀해 진흙을 벽돌로 구워 탑을 세웠는데 벽돌 탑, 즉 전탑이라고 부릅니다

둘째, 석탑은로 신라시대의 탑들은 석탑이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튼튼한 화강석이 많이 있고 쉽게 구할 수 있었으므로 돌로 쌓은 탑이 많이 있습니다.

셋째는 목탑인데, 일본은 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목탑을 많이 세웠습니다.

 

국보 제30호 분황사석탑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분황사탑은 벽돌탑처럼 보이지만 벽돌이 아니고 안산암이라는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석탑으로, 전돌로 쌓은 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고 부릅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보고 있으나, 뒤에 몇 차례 보수되어 어느 정도까지 원형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으로,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는데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이라 하기도 합니다.

 

분황사 석탑은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3층만 남아있는 모전탑으로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헐었다고 전합니다. 

동경잡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스님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 졌다고 하나 알 수 없고, 현재의 모습은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라고 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는데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수리 당시 2층과 3층 사이에 들어 있던 사리함(舍利函) 속에서 각종의 옥류(玉類), 가위, 은바늘 등과 함께 숭녕통보(崇寧通寶), 상평오수(常平五銖) 등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중국(中國) 주화(鑄貨)가 발견됨으로써 창건 당시의 사리장치(舍利裝置)에 추가하여 고려시대에서도 탑을 해체하고 수리하면서 동전을 넣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탑의 사면에는 입구가 뚫려져 있는 작은 감실을 만들고 입구 좌우에는 인왕상을 배치하였으며, 두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습니다.

 

  

돌사자의 앞다리가 잘려져 있음에 세월의 무상함일까? 아니면 그 누구의 나쁜 손버릇일까?

 

돌사자

너 암수중 어느쪽이냐?

 

그 옛날 어찌 저리도 돌을 갈아 만들었을까?

놀라울 따름이다.

안산암이라는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석탑

 

수학여행을 온 것일까?

학생들이 분황사탑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잠시 지켜보는데 애들이 근질거리는지 잠시도 못있고 움직여서 통제하는라 고생을 하고 있다.

그래도 열심히 설명을 하고, 선생님의 말씀을 적어가며 듣는 학생들도 있다.

 

 

 

분황사탑의 잔재들이 절의 한 구석에 놓여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분황사화쟁국사비부

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입니다.

고려 명종대(1170∼1197) 한문준이 건립한 화쟁국사비의 대석이 남아있는데,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諡號 : 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습니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지금은 이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 놓았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겨져있습니다.

 

화쟁국사비앞에서 문화유산탐방단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계시는 박주현선생님.

 

김정희가 화쟁국사비를 확인하는 글귀를 새겨 놓은 것으로 마른 상태에서 잘 보이지 않아 물을 뿌려 확인하고 있는데 내눈에는 그래도 잘 보이지 않는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분황사석정

분황사 사찰내에 있는 신라시대의 우물로 삼용변어정이라고 부릅니다.

돌우물로 바위틈 사이로 솟아 오르거나 흘러 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시설해 놓은 모습으로, 겉면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의 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분황사 우물과 서라벌 동북쪽의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東池)와 청지(靑池)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 중국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물고기로 변신시켜 잡아가니,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호소하였다.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어 다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 불교억압정책에 따라 사찰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 우물에 넣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며, 현재에도 사용될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고 합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분황사약사여래입상

분황사의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 주는 약사여래불로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육감적이어서 세속적인 느낌을 주며, 때로는 어린이의 얼굴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두껍게 입고 있으며, 옷주름의 표현은 다분히 형식적이으로, 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서 약사불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98년에 불상이 있는 보광전을 고쳐 짓기 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된 기록을 통해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며 현재의 불상은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만들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가을이 짙어져 가고 있네.

우리들에게 여름날의 휴식처를 제공하여 주던 나뭇잎은

어느덧 낙엽되어 바람에 흩날리네.

가을이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