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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연계체험] '왕에게 가다' 세종대왕의 능인 여주의 영릉

들꽃(野花) 2010. 12. 9. 06:00

[세계유산연계체험] '왕에게 가다' 세종대왕의 능인 여주의 영릉

영릉(英陵)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세종은 1397년(태조 6)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18년(태종 18)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에 22세의 나이로 조선 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종대왕은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31년 6개월의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망한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하여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였다.

민본 정치를 중요시하였는데, 당대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 역시 백성들과의 소통을 바라던 세종의 고민이 낳은 산물이었다. 유교 정치와 자주적인 문화의 융성을 통하여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번영을 가져왔다.

 

 

왕릉은 크게 진입 공간, 제향, 전이 공간, 능침 공간으로 구분한다.

진입공간에 있는 재실로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세종 때 만들어진 수표, 풍기대 등

 

 

 

 

홍살문

홍살문은 정자각 앞쪽 참도가 시작되는 곳에 능원이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기 세운 것이다.

 

금천교

능역과 속세를 구분해 주던 다리

 

 

 

참도

신도와 어도로 두 길의 높낮이가 다르다.

 

 

정자각

제사를 모시는 공간으로 왕릉의 중심적 건축물이다.

 

 

 

정자각에서 봉문이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장명등이 있고 그 뒤로 혼유석이 2개가 있는데 이는 왕과 왕비의 능이 합장릉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보통 능에 올라갈 수 없는데 이곳 세종대왕의 영릉은 능에 가까기 올라갈 수 있어 능침 공간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다.

 

 

문인석

 

무인석

 

 

 

 

영릉의 재실이 있던 자리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인증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