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여행

[해남여행] 600년을 이어온 남도의 종가 해남 윤씨가의 녹우당

들꽃(野花) 2012. 1. 14. 06:00

녹우당

남도여행하면 생각나는 것이 윤선도와 연관된 유적들이라 할 수 있다.

해남에는 특히 녹우당과 윤선도유적들이 많이 있어 관광객들로 항상 분비고 있다. 가족여행의 남도 답사코스에 포함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코스 중 하나이다.

 

지난 2009년 9월에 여행블로거기자단 팸투어의 일행으로 여기를 방문한 적이 있어 이번 답사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사실 처음으로 낯선 곳을 찾을 때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 여행을 갔다와서 아쉬워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곳 윤선도유적지는 지난 번과 달리 가족여행을 왔기에 시간적 제한이 없어 여유로워서 좋다.

그때는 꽃무릇이 여기저기 많이 피어 있었는데 한달이라는 시간이 주변의 풍경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유적지를 찾아 들어간다.

조금 올라가니 오른쪽에 새롭게 지은 전시관 같은 건물이 보이길래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이라 하여 새로이 개관을 한 것이다.

 

한 터에서 600년 이상 가문을 유지하여 온 해남 윤씨가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가 살았던 집으로 윤선도의 4대 조부인 효정(1476∼1543)이 연동에 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집터 뒤로는 덕음산을 두고, 앞에는 벼루봉과 그 오른쪽에 필봉이 자리잡고 있는 명당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녹우당

푸른 비로 사람 마음을 흠씬 적셔주는 곳, 바로 녹우당을 일컫는 말이다.

녹우당의 사랑채는 효종 임금이 세자 시절 자신의 사부였던 윤선도가 수원에 있을 때 하사한 집으로 옛 사부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는 집이라 하겠다.

윤선도가 82세 되던 해인 1668년 배를 이용하여 해남으로 옮겨와 다시 지었다. 서향을 하고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장소에 세워졌으며 전면과 우측면에 툇간을 둔 네 칸 집으로 좌, 우측에 각각 두 칸씩 사랑방과 대청이 배치되었다. 경기도의 민가를 호남으로 옮겨온 집이라 할 수 있다.

 

녹우당의 당호가 유래된 것은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 '녹우당 앞의 은행나무 잎이 바람이 불면 비처럼 떨어지기 때문'에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와 '집 뒤의 대나무 숲에서 부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곳 해남윤씨 녹우당 일원은 사적 제167호로 지정되었으며, 입구에는 당시에 심은 은행나무가 녹우단을 상징하고 , 뒷산에는 500여 년 된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이 우거져 있다. 이곳에는 윤두서자화상(국보 제240호), 『산중신곡집』(보물 제482호), 『어부사시사집』 등의 지정문화재와 3천여 건의 많은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유물전시관에서 녹우당을 보면 오래된 은행나무가 시야에 들어온다.

마침 관광객 세 분이 은행나무의 둘레를 팔을 벌려 재고 있어 카메라에 얼른 담는다.

세 분이 팔을 벌려도 닿지 않을 정도의 둘레로 크기가 엄청난 나무이다.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

당시에는 전시관이 협소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번 방문에는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이 새로 개관을 하였기에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임시 개관 중으로 10월 15일날 정식 개관을 한다고 한다. 전시관은 녹우당 고택 주변의 경관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전통 한옥의 외형을 갖추고 있다.

1층에는 특별전시실을 지하1층에는 영상상영과 워크샆 등을 겸할 수 있는 세미나실을 비롯하여 제1, 2 전시실로 나뉘어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전시관 입구

 

 

 

공재의 미술세계를 감상할 수 있도록 전국의 각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을 모아 특별전시실을 마련했다.

 

 

제1전시실에는 해남 윤씨가의 학문과 예술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서적과 고문서, 그리고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제2전시실은 고산 윤선도와 관련된 고문서와 유물이, 회화실에는 공재를 비롯한 3대 화가를 배출한 낙서 윤덕희와 윤용의 그림 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실내에는 촬영금지라 하여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의 외형

 

 

녹우당의 멋을 한층 더 살려주는 것은 다름 아닌 저 오래된 은행나무다.

향교를 가 보면 은행나무와 향나무 등이 심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 녹우당에도 저 은행나무가 있어 고풍스러운 모습을 만끽할 수 있다.

 

 

은행나무의 크기를 재고 계셨던 분들이 떠나고 난 뒤 녹우당 입구의 모습을 담아본다.

파란 하늘에 은행나무, 그리고 돌담으로 만들어진 담장을 보며 들어간다.

 

녹우당의 행랑과 어울린 솟을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효종이 세자시절 사부였던 윤선도에게 하사한 사랑채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 왔을 때는 저 들마루에 앉아서 휴식을 취했는데 어찌 된 것인지 이번에는 출입을 제한하는 줄이 쳐져 있다.

들마루에 앉는다고 집이 무너지나, 들마루가 닳아 없어지나?

입장료를 내고 들어왔는데 관광객들이 들마루에 걸터앉아 윤선도를 비롯한 해남 윤씨가의 이야기를 듣는 다면 얼마나 좋은가?

뭐든지 하지마라, 하지마라.

참, 어이가 없다. 한국의 건축들은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데 저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본다.

조선 선비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찾아보려고 하는데 이곳 녹우당 어디에 편히 앉을 수 있는 곳이 있던가?

한번 물어보고 싶다.

 

주변을 둘러본다.

 

녹우당의 현판은 윤두서와 절친한 친구인 옥동 이서의 유필로 한국적 서체라고 할 수 있는 동국진체(조선의 참된 글씨, 윤두서와 이서가 함께 창시)를 만든 이서가 쓴 현판이다.

 

정관

선비는 조용히 홀로 있을 때에도 자신의 흐트러진 내면의 세계를 살펴 고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졸재 윤행의 11대 손인 나산(윤성호, 자는 도원)이 쓴 글로 알려지고 있으며 어초은 윤효정의 은덕을 나타내는 뜻을 담고 있다.

 

 

운업

'운'은 잡초를 가려 뽑아 숲을 무성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고, '업'은 일이나 직업, 학문, 기계의 뜻을 지니고 있어 늘 곧고 푸르며 강직한 선비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 녹우당 선대 당주들의 이상과 뜻을 담고 있다.

 

마당에는 향나무와 지금은 말라버린 앙상한 꽃가지들이 있어 이집의 분위기를 말하는 것 같다.

 

 

 

해남 윤씨가는 윤효정 이후로 백성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으녀 세가지 일화를 통해 어초은 가문의 백성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삼개옥문 : 옥문을 세번 열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못해 옥에 갇히는 경우가 많다는 소식을 들은 윤효정은 관아에 찾아가 백성들의 세금을 대신 내어주고 풀어주는 일을 세번이나 했다고 한다. 이일로 인하여 해남 윤씨가는 삼개옥문적선지가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근검과 적선의 삶을 가르치다.(윤선도)

경기도 양주에 머물던 당시 백성들의 상소문을 대신 써 주었던 일은 적선을 실천한 대표적 예의 하나이다.

백성을 소중하게 생각하다.

윤두서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밀린 빚을 받으러 갔다가 가난한 백성들의 삶을 보고 채권을 찢어버렸다는 미담이나 추운 날에도 얇은 홑옷을 입고 침실에는 병풍을 치지 않았다는 일화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근검한 삶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고산사당

 

어초은 사당 옆에는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어초은묘와 천연기념물 제241호 해남 녹우단 비자나무숲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어 그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어초은 묘

어초은 윤효정은 해남 지역의 향리층이었던 해남 정씨 귀영의 딸과 결혼하면서 막대한 경제력을 확보하였고, 강진 덕정동에서 해남 백련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금남 최부에게 학문을 배웠고, 1501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이후에는 과거보다는 교육에 힘써 최부와 함께 해남 지역의 학문과 예의 고장으로 이끄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많은 후손들이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아들 윤구는 최산두, 유성춘과 함께 호남 3걸로 이름이 났으며, 성균관 사성을 역임하였고, 막내아들 윤복은 안동부사, 사헌부 지평,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윤구의 두 아들 중 윤홍중은 예조 정랑과 영광 군수의 자리에 올랐으며, 둘째 아들 윤의중은 평안도 관찰사, 공조 판서, 예조 판서, 좌참찬 등을 벼술을 지내고, 1559년에는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윤홍중의 둘째아들인 윤유기는 사헌부 지평, 사간원 헌납, 강원도 관찰사 등의 벼슬을 거쳤다.

윤유기의 대를 이은 윤선도는 강직한 성품과 해박한 지식으로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사부를 비롯하여 많은 벼슬을 거치면서 가문의 명예를 높였고, 유배와 은거 생활 동안 창작한 시가문학은 오늘날 국문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위치에 있다.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는 뛰어난 그림과 글씨로 이름을 드높였으며, 박학을 추구하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 실학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오래된 소나무들로 둘러싸인 비자나무 숲으로 가는 길 

 

천연기념물 제241호 해남 녹우단 비자나무 숲

해남 윤씨의 중시조인 효정이 500년 전 심은 것이 자란 것이라고 하며 가장 큰 나무는 높이 20m내외, 가슴 높이의 지름이 1m 정도이다.

 

“뒷산의 바위가 드러나면 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유훈을 남기자 후손들이 숲의 보호에 힘썼으므로 오늘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추원당으로 가는 길

 

추원당

 

추원당은 고산 윤선도의 고조부(4대조) 윤효정의 제각으로 1935년에 지었다.

시향은 음력 11월 15일 어초은 사당에서 지내고 이곳 추원당에서는 제관과 참배하는 후손들이 숙식을 하며 문중회의를 한다.

추원이란 먼 조상이나 부모를 추모하여 정중히 공경을 다함을 뜻한다.

 

 

 

 

고산윤선도선생의 어부사시사를 기록한 시비로 어부사시사는 1651년 효종 2년(고산 65세)에 완도 보길도에서 지은 작품으로 봄10, 여름10, 가을10, 겨울 10수로 총 40수로 이루어진 시다.

 

우는 것이 뻐국샌가 푸른것이 버들숲가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어촌의 두어 집이 안개 속에 들락날락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맑은 갚은 연못에 온갖 고기 뛰노도다.(봄)

 

석양이 좋다마는 황혼이 가까웠다.

배 세워라 배 세워라

바위 위에 굽은 길이 솔아래 비껴 있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푸른나무 숲 꾀꼬리 소리 곳곳에 들리누나.(여름)

 

강촌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넓고 맑은 물에 마음껏 즐겨보자

거덩 찌거덩 어야차

인간세상 돌아보니 멀도록 더욱 좋다.(가을)

 

물가에 외롭게 선 솔 홀로 어이 씩씩한고

배 매어라 배 매어라

험한 구름 원망 마라 인간세상 가리운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파도소리 싫어 마라 속세소리 막는도다.(겨울)

 

 

 

저 산 중간쯤 조금 찐하게 보이는 곳이 천연기념물의 비자나무가 자라고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