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익산
백제 왕도의 도시 익산에서 백제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는 미륵사지를 찾아본다.
겨울의 절정이라
겨울의 차가운 날은 오늘은 햇살을 머금어 포근하게 느껴진다.
익산의 미륵사지를 몇번 찾았지만 올 때마다 항상 새롭고 뭔가 은근한 기대감을 갖고 오게 된다.
오늘은 또 어떤 맛으로 내게 다가올까?
미륵사지는 백제 제30대 무왕(재위 600-641)대에 세운 사찰로서 미륵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제이(第二) 무왕조에 언급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백제 무왕과 무왕비인 선화공주가 사자사에 행차하려고 용화산 못가에 이르니 큰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므로 경의를 표한 뒤 왕비가 왕에게 절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니 지명법사의 도움으로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고 미륵법상 삼존과 전(殿), 탑(塔),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다.
1990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륵사지 발굴조사에서는 2만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1993년 미륵산 사자암 발굴조사에서는 백제 및 통일신라의 기와와 토기, '지치2년사자사조와'명 암막새 등이 출토되어 삼국유사 기록의 신빙성을 입증해 주고 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와유록, 금마지 등의 문헌 기록과 약 17년간에 걸친 발굴조사를 종합해 볼 때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신장할 목적으로 조성한 동양 최대 최고의 국립사찰로서 조선후기 17세기 무렵에 폐사되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미륵사의 초창 가람인 무왕대의 가람은 중문, 탑, 금당을 일직선으로 배치한 중원과 이를 둘러싼 회랑, 그리고 중원의 그것과 거의 비슷한 금당과 탑을 중원의 동쪽과 서쪽에 배치한 삼원병립식 가람으로 어디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미륵사지석탑은 미륵사지의 서원에 유일하게 서 있는 건축물로서 1층 동서남북 방향의 십자형 내부 공간과 중심에 심주석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매우 큰 특징이다. 입면에서는 목탑과 같은 구조와 건축기법을 표현하고 있어서 당시 백제 건축 문화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이 석탑은 본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절반 이상 붕괴되어 6층까지 일부가 남아있던 것으로 1999년 해체 보수정비가 결정되었으며 2001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해체조사 및 보수정비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현존하는 최대, 최고 규모의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보강되었던 시멘트를 제거하고 석탑을 해체 복원하는 작업이 진행중이다.
2009년 1월 14일 1층 내부 적심부재와 심주석을 해체 조사하는 과정에 1층 제1단 심주석 상면에 마련된 사리공내에 안치되어 있던 사리장엄이 발견되었다.
동탑은 1993년에 복원 되었으며 당간지주 또한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미적 감각 또한 맛볼 수 있다.
미륵산과 함께하는 유물전시관
미륵사지의 중심 길을 걷다보면 미륵사의 규모를 갈음할 수 있다.
미륵사지 서탑
일제강점기에 콘크리트로 복원된 석탑을 해체하고 조사중이다. 그 왼쪽에 보이는 하늘색의 지붕 건물에는 복원에 사용할 부재들이 있는 곳이다.
천으로 덮혀져 있는 것은 미륵사지 석탑의 부재들로 오랜세월의 풍화를 견디지 못하고 복원시 사용할 수 없는 부재들이다. 즉 나이를 먹고 힘이 없다는 것이다.
부재들의 사용여부를 검사하기 위한 시험을 모든 부재에 대해 실시했다고 한다.
보물 제236호 미륵사지 당간지주
당간지주란 사찰에서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인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서 당간 양쪽에 설치하는 돌기둥이다.
미륵사지 경내에는 석탑의 남쪽에 동서로 약 90m의 간격을 두고 규모나 형태, 조성수법이 매우 비슷한 당간지주 2기가 세워져 있다. 장식이 적으려 단정한 형태를 보이는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사찰내에 설치된 당간지주는 그 유래를 찾아볼 수가 없다.
복원된 동탑
동탑 내부에서의 탑돌이
고려시대의 기와가마
남북으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2개의 가마는 굴뚝과 천정, 화구부와 화구가 거의 유실되었으나 연소실과 소성실 측벽 일부는 잘 남아있다. 동서로 긴 가마로 풍화암반층 위에 판축방법으로 벽체를 다져 올리고 소성실에 기와를 깔아 만든 반 지하식 평요로 2기를 동시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소성실 내부에서 고려시대 기와와 연우4년(1317)명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말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륵사지 금당은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초반석 위에 1m 높이의 주춧돌을 올려 지음으로써 의도적으로 지면과 금당 바닥 사이에 빈 공간을 만든 독특한 건축양식을 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계곡을 메워 만든 곳으로 바닥에 평지석으로 보이는 것은 하부에서 다져져 올린 토석위에 다시 받침돌을 올리고 그 위에 다시 주춧돌을 올린 것이다.
저기 끝자락에 보이는 것은 조선시대 기와가마터이다.
회랑의 주춧돌로 주춧돌이 3열로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회랑이 2칸으로 설치되어 왕래하는 동안 서로 간섭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3호 미륵사지 석등 하대석
미륵사지 석등 하대석은 중원 목탑지와 동원 석탑지 북편에 2기가 위치하고 있다. 보이는 것은 중원 목탑지 뒷편에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발굴조사에서는 원래의 위치를 이탈한 석등 부재들이 적지 않게 조사되었다.
이곳 미륵사지 석등 하대석은 우리나라 석등 중 제작시기가 가장 빠른 것으로서 석등의 시원 양식을 전해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매우 크다.
서금당지
미륵사지 출도 석조물로
1980년부터 1996년까지 17년간 미륵사지 발굴조사에서 수습된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것이다.
전시된 석조물은 22류 60여점으로 동원9층석탑 부재, 석등부재, 당간부재, 건무 기단석, 맷돌, 다양한 형태의 건물 초석등이다.
금제사리봉안기
백제왕후가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탑을 조성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의 발원문으로 미륵사 창건배경, 발원자, 석탑 건립연대 등을 알 수 있다.
<원문해석>
가만히 생각하건데, 법왕(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감응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왕궁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의 사리를 남겨 3천 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그러니) 마침내 오색으로 빛나는 사리를 7번요잡(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함)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 할 것이다.
우리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沙宅) 적덕(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제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을 자량으로 하여 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나니, 왕후의 신심은 수경과 같아서 법계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불멸하시어 칠세의 구원까지도 함께 복리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미륵사지 창건과정을 그림으로 설명
일제강점기에 콘크리트로 보강된 미륵사지 석탑
목탑
미륵사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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