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여행

[김제여행] 농경사회의 젖줄 저수지를 만들다 - 김제 벽골제

들꽃(野花) 2012. 2. 1. 05:30

김제 벽골제

 

벽골제는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저수지로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에서 월승리에 걸쳐 약 3km에 이르는 제방이 현존하고 있으며 광범위한 고대 농경사 및 문화, 토목건축적 의의를 인정받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왕 21년(330)의 기록(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 처음 벽골지를 여니 제방의 길이가 일천팔백보이다)에 벽골제를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330년은 이 지역이 백제 영토로 추정되므로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오기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벽골제 축조시기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통일신라 원성왕 6년(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때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 25년(1415)에 다시 쌓았으나 세종 2년(1420)에 심한 폭우로 유실되었다.

이후 1925년 동진농지개량조합에서 이 제방을 관개용 수로로 개조함으로써 그 원형이 크게 훼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방길이 약 3km에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 총 5개의 수문이 있었으나 현재 단지 내에 제2수문 장생거가 있으며 제방을 따라 남으로 약 2km 내려가면 제4수문 경장거를 만날 수 있다.

 

벽골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농경사회에서 치수의 기능을 헤아려야 한다. 전통농경사회에서 치수는 식량생산에 절대적 요소로 생존의 문제이자 국가존속의 문제였다. 대규모 수리시설은 국가기간 시설이었으며, 왕의 권능은 치수자로서의 기능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벽골제는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로 고도로 발달된 토목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 획기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벽골제 제방 및 조선시대에 건립한 벽골제 중수비가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로 벽골제를 중심으로 남쪽을 호남지방, 서쪽을 호서지방으로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벽골제 홈페이지 : http://byeokgolje.gimje.go.kr/index.sko

주소 :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벽골제로 442번지

 

벽골제를 배경으로 열리는 김제의 지평선 축제는 7년 연속 대한민국 최우수축제로 선정된 자랑스런 축제이다.

지평선 축제는 최고, 최대의 수리시설인 벽골제를 배경으로 문화유산과 민속놀이, 우도농악,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는 김제 지평선 쌀 및 각종 쌀과 관련한 행사 등 도작김제를 체험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이다.

지평선축제 홈페이진 : http://festival.gimje.go.kr/index.sko

지평선 축제는 10월 10일 부터 14일까지 이곳 벽골제 일원에서 열린다.

 

벽골제에서 바라보는 관개수로와 그 너머의 드넓은 땅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벽골지문

 

 

 

농경사 주제관 및 체험관

농경의 역사를 참여와 체험을 통해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조성된 체험전시공간으로 신석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농경의 역사를 도구의 발달, 농업기술의 발달 등을 살펴 볼 수 있다.

 

 

자신의 희생하여 벽골제를 지키고자 했던 단야낭자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민속놀이로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행해지고 있으며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벽골제 전설에 의하면,

현재 전북 김제시 월촌동과 김제시 부량면의 경계를 이루는 원평천을 가로막은 벽골 제방에서 약 2백 미터 하류 지점의 신털미산[草鞋山] 북쪽 끝에 있는 커다란 웅덩이인 용추(龍湫)에 백룡(白龍)이 살면서 벽골제를 수호하였는데 사람들은 이 용을 벽골룡이라 불렀다. 한편 벽골제 중간 제방 약 1백 미터 하류지점인 부량면 용골마을 남단의 연포천(蓮浦川)에는 청룡(靑龍)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 두 곳을 가리켜 쌍룡추(雙龍湫)라 하고 백룡과 청룡을 쌍룡이라고 불렀다.
백룡은 온후(溫厚)하여 인명을 수호하고 제방을 지켜주며 재난에서 인간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청룡은 본래 성질이 사납고 이따금 비바람에 의한 재난을 일으켜 제방과 가옥에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인명까지도 해치고 있었다. 이에 이웃에 살고 있는 백룡이 충고하였으나 청룡의 난폭한 행동은 계속되었고 끝내는 쌍룡의 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붕괴 직전에 놓인 벽골제 보수 공사를 하게 되는데, 이때 청룡은 안전한 축제(築堤)와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보장하며 김제태수(金堤太守)의 외동딸 단야의 목숨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결국 단야낭자는 수많은 장정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쌓은 벽골제를 지키고 김제, 만경평야의 풍년을 가져오게 하기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치게 되고, 이러한 단야의 거룩한 희생정신에 감복한 청룡은 물러나고 인신 제물의 악습도 없어지게 되어 평화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장생거(長生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벽골제에는 총 5개의 수문이 있었고, 수문의 명칭은 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라고 한다.

그중 현재 제방과 함께 남아있는 수문은 두 개소로 단지 내 장생거와 단지 밖 벽골제 제방을 따라 남쪽으로 2km에 위치한 경장거이다. 1980년대 수문 일부 복원 공사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신증동국여지슬암에 실린 벽골제중수비의 기록에 제방의 단면과 수문구조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둑의 아래 넓이는 70자요, 위의 넓이는 30자이며, 높이가 17자이고 수문은 마치 구롱처럼 바라보였다. 또 (수문) 양쪽의 석주심이 움푹 들어간 곳에는 느티나무 판을 가로질러서, 내외로 고리와 쇠줄을 달아 나무판을 들어올리면 물이 흐르도록 하였으니, 수문의 넓이는 모두가 13자요, 돌기둥의 높이는 15자이며, 땅속으로 5자나 들어가 있다. ... 이것이 벽골제의 대략이니 때는 영락 13년(명의 연호, 태종 15년, 서기 1415년)이다.

 

관개수로로 변한 벽골제 현재 모습

 

 

 

 

벽골제 제방과 장생거 수문

 

 

 

벽골제 중수비

 

 

벽골제 한글비의 내용을 살펴보면

김제읍에서 남으로 15리쯤 되는 곳에 큰 방죽이 있는데 이곳을 벽골제라한다. 김제의 옛 이름이 벽골이므로 그에 따라 명칭을 붙인 것이요. 현재군의 명칭도 이 방죽으로 인하여 고쳐진 것이다. 과거의 기록에 의하면 방죽의 길이는 60,9453척이요 방죽안의 둘레가 77,406보다. 5개소의 도랑을 만들어서 물을 대는 논은 모두 9,840결 95점이라 하였다.(하략)

 

 

 

 

수문의 개폐를 체험할 수 있는 곳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국내 최고 최대의 농경유적으로 평가되는 벽골제의 농경문화적 가치를 기념하기 위하여 약 3km에 이르는 벽골제 제방 북단의 수문 장생거 근처에 대규모 사적지를 조성하였다. 농경문화박물관은 1993년에 착공하여 1997년 준공되었으며 1998년 4.21 개관하였다.

박물관은 3개의 상설전시실(농경전시실, 생활민속실, 벽골제언실)과 1개의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적 벽골제와 농경문화의 전통을 발굴, 전시, 연구, 보전하는 교육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제1전시실 농경문화실

 

-한 해를 살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어지는 노동의 연쇄와 그에 따른 농경도구들을 통해 노동의 흐름을 구성한 것으로 농부의 굵은 땀방울을 거울삼아 한해가 지나고 세대를 이어가는 삶이 순환한다.

 

 

철과 철기생산의 단면을 보여지는 단층

 

제2전시실 생활민속실

- 일상을 직조하다.

  실 내어 옷감을 짜고 다듬이질, 다리미질로 윤기나게 옷을 간수한다. 부엌을 정돈하고 장 담그고 술 담아 훈짐 가득한 부엌의 운영한다. 의생활과 식생활의 일상이 짜여진다.

 

어렸을 적 배가 아프면 배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의 손이 그리워진다.

 

곡식을 담아두는 곳으로 해설사님께서 자세한 설명을 하여 주시고 있다.

 

 

이것은 본래 일본식 술, 장 등을 담아 숙성시키는 나무통(발효통)이다.

1998년 박물관 개관 당시 '곡갑'이란 이름으로 기중되었다. 일제강점기 주조공장에서 발효통으로 사용되다가 그 후 곡식 저장용으로 활용되며 곡갑이라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곡창이란 지역 특성으로 인해 일제강점기에 김제에는 일찍이 일본식 청주공장이 들어섰다고 한다.

 

월촌입석(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7호)

입석은 마을의 입구에 세워져 재앙을 막아주는 수문신이자, 마을의 풍농과 평안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섬겨진 큰돌 문화재이다. 입석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남녀편으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하는데 여자편이 이겨야 그해 풍년이 든다고 믿고 있다.

줄다리기가 여자편의 승리로 끝나면 사용한 동아줄을 입석에 감아두고 고을의 풍농과 안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올린다. 입석에 감아둔 동아줄에 손을 대면 동티가 난다 하여 다음 제사 때까지 1년 동안 손을 대지 않는다.

이 입석은 사각기둥형 자연석이며 높이는 210cm, 폭 62cm, 두께 40cm이다. 전통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매년 지평선 축제 때 이곳 벽골제에서 입석 줄다리기를 시연하고 있다.

 

단야루

이곳 벽골제에는 단야설화가 전해오는데

신라 제38대 원성왕 때 김제 태수가 토목기술자인 원덕랑과 자신의 딸 단야를 맺어주기 위해 원덕랑의 약혼녀를 용의 제물로 바치려 한다. 그러나 이를 안 단야는 아버지의 살인을 막고 원덕랑이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용의 제물이 되었다. 이러한 단야의 효심과 희생정신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단야각과 단야루를 세웠으며 영정도 모시게 되었다.

 

소 테마공원

 

어렸을 적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버지는 저렇게 일을 하시고 논두렁에 앉아 아버지의 일하던 모습을 보고 하였는데 지금은 모든것이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주막에서 직접 만든 우리콩 두부음식과 막걸리 등을 옛 주막의 정취르 함께 맛 볼 수 있다.

 

전통가옥 및 민속놀이 참여 체험장

민속놀이 상설 체험장이 연중 운영되고 있으며, 그네뛰기, 널뛰기, 고리걸기, 투호, 굴렁쇠 굴리기, 윷놀이, 재기차기, 팽이돌리기 등 옛 선조들의 놀이문화를 고스란히 재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