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여행

[장수여행]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충과 열의 얼을 실천한 논개를 모신 장수의 논개사당

들꽃(野花) 2012. 2. 11. 06:00

 

진주성과 촉석루

진주성에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민관군 7만여명이 희생된 아픈 역사가 있으며, 진주성 촉석루 아래에는 왜놈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 순국한 논개를 상징하는 비석과 의암 등의 유적들이 있다. 호남절의록의 내용에 『기생 논개는 장수 사람으로 공이 사랑하였다. 』라고 논개의 출생지가 기록으로 남아있다.

 

논개가 태어난 고장

장수에서는 왜놈과 함께 순국한 논개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 지내고 있는 사당이 있다.

논개의 순국 사실은 입으로만 전해 오다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수록되면서 글로도 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에 충신·효자·열녀를 수록한 『동국신속삼강행』에는 기생의 정열(貞烈)을 표창할 수 없다는 이유로 누락되었다. 이런 사실과는 관계없이 진주 고을민들은 강변에 제단을 마련하여 논개의 넋을 위로하고 국가적인 추모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 마침내 영조 16년(1739)부터 국가의 지원을 받아 의암 부근에서 제를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고종 5년(1868)부터 가무와 함께 3일간의 대규모 추모행사를 마련하였다.

 

일제시대 때 중단되었다가 1954년 당대 일류화가인 김은호가 고증을 통해 논개의 초상화를 그리고 부통령인 함태영 선생이 직접 현판을 쓰면서 남산 공원에 사당을 세웠다. 1973년에는 성역화 작업이 승인되어 장수읍에 2만여 평의 대지를 마련, 사당을 이전하고 담장과 삼문을 세우고 단청까지 말끔하게 단장하였다.

 

지금은 매년 음력 9월 3일을 장수군민의 날로 정하고 해마다 큰 규모의 제례를 올리고 있다.

 

 

 

 

 

 

 

논개와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기념관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투신 순국한 촉석루의 의암

 

논개에 관한 내용이 최초로 수록된 어유야담은 어우당 유몽인(1559-1623)이 지은 수필 성격의 설화집으로 인간 생활의 여러 방면에서 야사 · 항담 · 가설 등이 수록된 5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우야담에 수록된 논개에 관한 글을 보면

 

『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계사년에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몸단장을 곱게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위에 서 있었는데 바위 아래는 깊은 강물이었다. 왜놈들이 바라보고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는데 오직 왜놈 하나만이 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다. 논개는 미소를 띠고 그를 맞이하였다. 왜놈은 그녀를 꾀려고 하였는데 논개는 왜놈을 끌어안고 강물로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관기는 모두 음탕한 창녀들이라고 해서 정렬로 일컫는 거이 옳지 못하다고 하지만 목숨을 걸고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았으니 그도 또한 덕화를 입은 인물이라 하겠거니와 끝내 나라를 위해 왜적을 따르지 않았으니 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으로 애달픈 일이로다.』

 

이밖에도 논개에 관한 기록은 정조23년에 간행된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좌의난이 일어났을 때 활약한 호남지방 의병들의 행적을 기록한 '남절의록'에 논개의 출생지와 최경회와의 관계를 기록하고 있다. 호남삼강록, 일휴당집 등에서도 논개의 기록이 있다.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

헌종 12년(1846) 논개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장수현에서 세운 것으로 당시 장수현감 정주석이 비문을 지었으며, 이 비문은 당시 장시 장수현감 정주석이 "호남절의록"의 내용과 장수 지역에 그 동안 전해오던 이야기를 근거로 하여 쓰여진 것이라 추정된다.

또한 이 수명비는 일제 때에 왜경이 주민들 몰래 부수어 버리라는 명령을 받고 젊은 청년을 모집하여 수행하려 했다. 그러나 장수군 젊은 청년들은 생장형수명비를 4km쯤 떨어진 밭에 파묻고 곡식을 심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하였다가 해방 후 캐내서 다시 세우게 되었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광풍이 몰아쳐 천만 가지 물건이 뒤섞이어 대오를 가릴 수 없듯이 전쟁으로 인해 흐트러진 질서를 영웅열사라고 어찌할 수 없는데 연약한 여자가 큰 뜻을 헤아려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마치 자기 집에 돌아가듯 가볍게 하였으니 어찌 열이라 아니 할 것인가.

거사 당일을 생각해보면 서릿발 같이 차고 고추같이 매운 그 기개가 하늘의 해와 별 같이 빛났으니 이 어찌 장하다 아니할 수 있으랴.

산에는 신령스런 풀이 있고 물에는 맛 좋은 샘이 있어서 군자도 칭송하는데 하물며 예사 사람으로서야 칭송하지 않을 수 없도다. 절개는 본래 타고난 천성이라 말한다.

세상에서 나라를 지키는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육십 평생이 되었으니 썩은 선비라 오히려 부끄럽구나.

언제나 의 · 열의 큰 공을 세운 이 여인에게 고운 옷을 입듯 공경심이 생기고 항상 감개무향하여 이제 수명비를 세워서 후세에 전하고 남은 여생을 순한 바람이 불어가듯 그녀의 영향을 따르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삼가 글을 써서 새긴다.

 

 

 

 

논개의 영정을 모신 의암사

 

논개영정

의기에 찬 모습으로 열 가락지를 끼고 투신 순국을 위해 왜장을 향개 가려고 하는 역동적이고 힘찬 모습을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