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여행

[공주여행] 백제에서 조선까지 공주의 역사와 함께한 공산성

들꽃(野花) 2012. 3. 1. 01:06

금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있는 공산성

 

백제 475년

백제 21대 개로왕이 고구려의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한산성에서 피살되자 그의 아들인 문주왕이 즉위하여 서울을 현재의 공주인 웅진(熊津)으로 옮기게 된다.

백제는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년)에 부여로 옮길 때까지 5대 64년간 왕도를 지킨 이 산성으로 공산성은 백제시대 웅진성으로 공주를 지키기 위한 대표적인 고대 성곽이다.

 

산성은 북으로 금감이 흐르는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연의 요새로서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형이며 원래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선조, 인조 때에 대부분 현재와 같은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성곽의 총 길이는 2,660m로 외성을 제외하면 2,193m가 된다. 성벽의 높이는 약 2.5m, 너비 약3m로 대부분 보수되었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 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는데 1993년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다.
암문, 치성, 고대, 장대,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있으며 쌍수정, 영은사, 연지, 만하루 등이 있고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 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주차장에서 공산성의 금서루로 올라가는 길로 길 우측에는 공주와 관련된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공산성 금서루

공산성 4개의 성문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문루이다.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가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 등의 문헌 기록과 동문 조사 자료 및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복원하였다.

 

토요일 답게 많은 사람들이 산성의 성곽길을 걷고 있다.

 

경사가 있어 빠른 걸음으로 걷자니 땀이 흠뻑 배어난다.

 

공산성 성곽에서 바라보는 공주 시내, 저 멀리 보이는 산이 무령왕릉이 묻혀있는 송산리고분군이다.

 

보수 공사가 끝난 공산성의 성곽길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를 밟고 사는 우리네가 잠시나마 이곳에서 흙길을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인조가 이괄이 일으킨 반란(1624)을 피하여 공주로 잠시 피난 왔을 때, 이곳에 머물렀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쌍수정이다.

 

쌍수정사적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여  세운비로 비문에는 이괄의 반란,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 동안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 등이 적혀 있다. 1708년에 세웠으며 인조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속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공주)로 수도를 옮긴 475년 이후에 세워진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1985~1986년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10칸~20칸 등의 큰 건물터와 연못 및 저정시설 등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었으며 백제의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하여 많은 유적이 발굴되었다.

일부 건물터에서는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파서 기둥을 세운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산성 연못

백제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에 있던 연못으로 연못 안에서는 연꽃무늬 만자, 무늬 막새기와, 벼루, 등잔, 삼족토기 등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들이 발굴조사에서 나왔다. 연못은 대접 모양으로 자연석을 정연하게 쌓아 만들었는데 윗부분 지름이 7.3m, 바닥지름이 4.78m, 깊이는 3m에 이른다.

 

쌀쌀한 날 조용히 모든 것을 간직한 채 공산성은 말이 없다.

 

비비 꼬여져 올라간 나무의 모양이 특이하다.

 

진남루로 가는 성곽길

 

 

진남루

공산성의 남문으로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조선 초기에 석성으로 다시 쌓으면서 세운 문루이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고쳐지었는데 지금있는 건물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여 원래대로 복원한 것이다.

 

진남루에서 영은사로 넘어가는 고갯길

 

영은사가 내려다 보인다.

 

영은사

조선 세조4년에 세워진 사찰로 묘은사로 불렀다가 이괄의 난 때에 이절에 피신한 인조가 은적사로 하였다가 다시 영은사로 고쳤다.

광해군 8년에는 이곳에 승장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할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고 여기서 훈련된 승병은 영규대사의 인솔 아래 금산전투에 참여하였다. 영은사 부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불상 6구가 출토되어 조선시대 이전에도 이곳에 사찰이 존재했었음을 짐작케 하는데 백제시대부터 사찰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만하루

조성 영조대에 건립된 누각으로 연못과 금강 사이에 자리 잡아 공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과 평소 경치를 관람하는 역할을 하였다.

홍수로 붕괴되어 땅 속에 묻혔다가 1982년 발굴조사로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1984년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복원하였다.

 

공산성 연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방형의 연못이다.

금강에 가까이 위치하여 물을 쉽게 확보할 수 있게 하였고, 연못의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로 층을 이루게 단을 쌓았으며, 연못 수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북쪽과 남쪽에 계단 시설을 하였다.

특히 성의 안과 밖을 몰래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든 암문이 연못까지 연결되고 있어 산성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공주 잠종냉장고

충청남도에 있는 잠업 농가에 누에씨를 보급하기 위해 만든 저장시설이다.

일반적으로 누에는 알 상태로 월동하여 4월 중순에 부화한다. 그러나 누에의 먹이인 뽕잎이 본격적으로 피어나는 때는 5월이 되어야 한다. 이때까지 부화를 억제시켜 농가에 보급하기 위해 겨울철 금강의 얼음을 채취하여 잠종냉장고에 넣음으로써 낮은 온도를 유지하게 하여 누에의 부화시기를 늦추었다. 보호고는 지하1층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만들어졌다.

 

한적하게 거닐기에 딱 좋은 곳이다.

 

공북루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길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관찰사 유근이 쌍수산성을 고쳐 세우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를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부르고, 그 옆에 월파당을 지었다고 한다. 현종 4년(1663) 관찰사 오정위가 낡은 것을 다시 지었으며 기록은 송시열이 하였다. 월파당은 효종 5년(1654)에 붕괴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공북루는 송시열이 쓴 기록을 비롯해 여러 글이 걸려 있어 멋스러운 경치를 더해 주는 건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루이다.

 

백제문화체험장

 

 

옥사체험장

 

금서루 아래에서 공산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어린 학생들

 

 

 

공산성의 야경을 담아본다.

 

은은한 불빛 아래 빛나는 공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