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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답사/울진] 울진 대풍헌 - 경상북도 기념물 제165호

들꽃(野花) 2012. 5. 2. 08:15

울진 대풍헌 (蔚珍 待風軒) / 경상북도 기념물 제165호

소재지 : 경북 울진군  기성면 구산봉산로 105-2(구산리 202)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가운데 경북 울진에서의 1박 2일 여행이 있어 관동팔경의 하나인 월송정을 보러 가는 길에 울릉도 · 독도와 관련된 건물이 있다하여 찾아간다. 동해안의 작은 포구 구산리에 있는 대풍헌이란 건물이다.

 

  대풍헌이란 이정표가 있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골목안으로 20m 정도 들어가니 일자형 건물이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다. 비록 건물 하나만 있지만 이 건물이 주는 의미는 지금 일본과 독도 문제로 시끌러운 이 시점에 큰 의미가 있다. 바로 이 건물로 인해 조선이 19세기에도 울릉도를 실질적으로 관리했던 상세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풍, 기다릴 대(待), 바람 풍(風) 즉 바람을 기다린다. 라는 뜻의 건물이다.

   왜, 바람을 기다릴까?

   바로 울릉도를 들어가기 위해서다. 울릉도에도 대풍감이라는 지역이 있어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대풍헌은 조선시대 구산포에서 울릉도로 가던 수토사들이 순풍을 기다리며 머물렀던 건물이다. (여기서 수토란 수색하여 토발한다는 뜻임)

 

 

 

 대풍헌 건물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구산동사 중수기에 의하면 1851년(철종 2년) 중수하고 대풍헌이란 현판을 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건물은 정면 4칸 × 측면 3칸의 일자형 팔작집이며, 현재 마을 주민들의 집회장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건물의 평면구성이나 일부 가구수법에서 특색을 보이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건물의 여러 부분이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개조, 변형되어 있어 2010년 해체 복원 하였다.

 

 

 

   대풍헌 소장 문서들은 울릉도를 순찰하는 수토사 일행의 접대를 위해 소요되는 각종 경비를 전담했던 구산동민들의 요청에 따라 부담을 경감할 수 있는 방책에 대해 관아(삼척부)에서 결정해준 내용의 완문(完文)과 절목(節目)이다. 이 완문과 절목은 각각 6장으로 이루어져(成冊) 있으며, 곳곳에 주문방인(朱文方印)이 찍혀 있어 작성 당시의 원본임을 말해주고 있다.

  완문(完文)이란 조선시대 관부(官府)에서 일반 백성들에게 어떤 사실을 알리거나 특전을 부여할 때 발급하는 문서로 어떠한 사실의 확인 또는 권리나 특권의 인정을 위한 확인서(인정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수토절목(搜討節目)의 수토란 수색하여 토벌한다는 뜻으로 이때의 조항을 적은 것이 절목이다.

 

  완문과 수토절목의 내용을 살펴보면, 삼척진영 사또와 월송만호가 3년에 한 번씩 울릉도를 수토할 때 평해 구산리에서 출발하는데 바람의 형편에 따라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기도 하였다. 관아에서는 구산리 주변 9개 마을에 돈을 풀어서 생긴 이자로 그 경비를 충당하였으나, 각 마을의 동세(洞勢)가 각각 다르니 민원이 자주 일어나 그 해결 방도를 논의한 바를 관부에서 결정한 것이다.

 

  이들 문서를 통해서 조선후기에 울릉도·독도를 수토할 시 당시 평해군의 구산리가 기점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경비의 조달방법을 통하여 당시 연해 촌락주민들의 생활상의 편린을 엿 볼 수 있다.  또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왕조실록』에서 울릉도에 수토사를 파견했다는 기사가 보이지 않아 수토사 파견이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파견되고 있었지만 기록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는데, 이 문서들에 의해 19세기에도 여전히 조선정부가 울릉도·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인식하였으며, 정기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려고 순찰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제작시기가 간지(干支)로만 기록되어 있어 연대를 추정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나,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완문은 신미년(1811년, 조선 순조 11), 수토절목은 계미년(1823년, 조선 순조 23)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문서들은 조선시대 국가가 구산동민에게 보낸 관찬문서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삼척진장과 월송만호가 번갈아 가며 울릉도·독도를 수토한 내용을 증명해주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며, 조선시대 울릉도를 관리하던 수토사들의 출발지라는 점에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