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여행] 백제 사비시대의 도성인 부소산성
백제의 아픔을 간직한 백마강이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수 많은 이름을 가진 금강이 부소산성 아래에서는 백마강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구드래에서 고란사 선착장까지 운행하는 유람선에서는 쉬지 않고 백마강과 관련된 노래들이 들려오는 것을 봐서는 이곳이 백제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자!
그곳으로.
부소산성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부소산성은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중(二重)의 성벽을 쌓은 것으로 보이며,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비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부소산성의 산성둘레길
부소산성으로 들어간다.
매표소가 있는 부소산문
이제 백제 사비시대의 도성인 부소산성으로 들어간다.
부소산문을 들어가자 넓은 공터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부여관북리유적이 있고, 오른쪽으로 길이 보인다.
부여 관북리 유적(사적 제428호)
이곳은 백제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부소산성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1982~83년 발굴조사 때 백제시대의 연못이 발견되었고, 1992년 발굴 조사때 건물터, 하수도, 도로 유적 등이 발견되어 이 일대가 왕궁이었을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연못은 동서가 긴 사각형으로 활석을 이용하여 정교하게 쌓았다. 연못 내부에서 많은 연꽃무늬수막새·토기·금동재 귀걸리·나푸판에 글씨를 쓴 목간·등잔·철창·철촉·대바구니·목제품 등 백제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간은 백제의 것으로는 처음 발견된 것이며, 당나라 동전인 개원통보가 발견되어 연못의 축조연대에 참고가 되고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관아가 자리잡고 있었다.
부소산성을 둘러보러 가는 길
남정네 두 사람이 말 없이 걷는다.
나도 말없이 그렇게 두 사람을 따라간다.
갈림길
오늘의 목적지는 낙화암과 고란사, 그리고 고란사선착장
일행들 대부분은 지름길인 좌측으로 가고, 나와 몇 분만 오른쪽으로 산성길을 따라 여유롭게 걸어가려고 한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조금가면 백제의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 장군을 모신 삼충사 사당을 만날 수 있다.
삼충사
백제의 충신인 성충(?~656), 흥수(?~?), 계백(?~660)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 세운 사당이다.
성충은 의자왕 때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싸아다 황산벌에서 장렬히 죽은 장군이다.
삼충사
사당하면 영정을 모셔놓은것이 보통인데, 이곳에는 영정이 모셔져 있지 않다.
신록이 우거진 숲길을 따라 걸어간다.
가다보면 이렇게 흙으로 쌓은 토성을 만나게 된다.
산성길을 걷는 맛이 최고다.
영일루를 만나게 되는 순간
문화재수리를 알리는 현판과 커다란 장막으로 영일루가 사라져 버리고 없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계속 걸어간다.
열일루(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1호)
백제시대에 영일대가 있었던 곳으로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지금의 건물은 1964년 흥산에 있던 조선시대의 관아문을 옮겨와 세운 것으로 이름을 영일루라고 하였다. 누각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르게 다듬는 공사를 할 때 백제의 와편이 많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청마산성이 바라다 보이며,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영일루를 지나
좌측으로 넓은 터가 보인다.
바로 군창지다.
군창지(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0호)
부여 부소산성 동쪽 정상부(해발 98M)에 있다. 1915년 이곳 지하에서 쌀·보리·콩 등의 불에 칸 곡식이 발견됨으로써 군량미를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건물터의 규모가 상세히 밝혀졌다.
건물의 배치는 ㅁ자 모양으로 가운데 공간을 두고 동서남북으로 배치하였는데 길이 약 70m, 넓이 약 7m, 땅속 깊이 약 47cm 정도이다.
지금도 이 일대를 파보면 불에 탄 곡식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주변에서 분청사기편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조성연대를 고려말에서 조선초로 보고 있다.
군창지를 지나
잘 다듬어진 길을 벗어나 토성길을 걸어간다.
흙을 밟는 느낌
뭐라고 표현할까?
아스팔트나 콘크리트포장 도로가 아닌 흙길을 만나기 어려운데
부소산성에서 밟는 이 느낌
너무나 좋다.
어때요?
걸을 만 하겠죠.
이길을 몇 사람만이 걸었다는 얘기를 꼭 하고 싶네요.
여유로운 자 만이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빨리 목적지에 가서 두리번 거릴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연을 만끽하고 자연과 함깨하며 걸어보면 얼마나 좋은가?
사람들은 때론
너무나 빨리 빨리 하며 사는 것이 안타깝다.
좌측의 블럭길과 우측의 흙길
당신은 어느길을 가겠습니까?
수혈건물지 자료관
이 모형은 부소산성 내 수혈건물지 및 목책공 주변 유적을 모형화 한 것이다.
시간이 없어 반월루는 통과
사자루도 통과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백화정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땀이 나네요.
도착하니 시간이 10분 연기되었다고 합니다.
허탈한 이 마음,
반월루, 사자루를 보고 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네요.
진작에 알려주었으면 충분히 돌아보고 올 수 있었을텐데~~~
백화정(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8호)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위에 평면을 6각형으로 지은 정자이다.
백제 멸망 당시 궁녀들이 이곳의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죽은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9년에 세운것이다.
정자의 바닥을 지반에서 높이 띄우고 남쪽에 나무계단 하나를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평난간을 설치해 두었으며 천정에는 여러가지 연꽃 문양을 그려 놓았다. 정자에 올라서서 보면 주변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백화정에 오르지 않고
아래의 낙화암으로 바로 간다.
예전에는 낙화암이
자연 그대로 암반위에 난간만 설치하였는데
오늘 보니 나무테크를 설치해놓아 자연미가 사라져 버린것이 아쉽다.
사람들이 편하다고는 하지만
삼천궁녀들의 발길을 느낄 수 없어 안타깝네요.
낙화암(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110호)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660년(백제 의자왕 20)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백제여인들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고 이곳에 이르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기록이 전하며, 후세 사람들이 낙화암이라 불러 백제 여성의 절개와 고귀한 충렬의 표본이 되고 있다. 암벽은 60m 정도이며, 절벽 아래에는 송시열의 글씨로 전하는 '낙화암'이 새겨져 있다.
낙화암에서 바라보는 백마강
얼마전에 4대강사업의 일환으로 공사가 끝난 것으로 아는데 맑아야 할 물이 누런 흙탕물이 되어 흐른 것을 보니 아니 봄만 못하다.
고란사가 수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고란사로 가는길
고란사(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사찰의 유래는 암벽에 자라고 있는 고란초로부터 온 것이라 한다. 현 건물은 승각사를 이건한 것으로 정조 21년(1797)에 개건한 것이다.
사찰 전면의 2개의 연화문방형초석은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고란정
특별한 바가지와 특별한 물이 있어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해준다.
물을 한잔 마실때마다 나이가 얼마나 젊어진다고~~~
고란사선착장
조룡대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적을 쫓아 금강을 건너러 할 때 강물속에 교룡이 방해하므로 교룡이 좋아하는 흰말을 미끼로 종룡대 바위위에서 잡아올렸다고 하여 강이름을 백마강, 낚시했던 바위를 조룡대라 했다고 전한다.
황포돛배
황포돛배를 타고 구드래선착장으로 가려고 한다.
방금 떠나온 고란사 선착장
좌측에 보이는 바위가 조룡대다.
그런데 맑은 물의 금강은 어디로 가고 4대강 사업이 끝났으면 맑은 물이 흘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백제의 아픈역사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는 낙화암
삼천궁녀가 꽃이 되어 뛰어 내렸던 낙화암,
그 바위가 오늘도 변함없이 그자리에 있고
그 밑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도 변함없는데
변한것이라고는 세월만 변했구나.
오늘은 왠지
조용히 있고 싶다.
그래서 그런지 황포돛배를 타고 실내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실내에서 주변을 둘러볼 뿐
그리고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 들리어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철갑옷에 맺은 이별 목메어 울면
계백장군 삼척님은 님사랑도 끊었구나.
아 오천결사 피를 흘린 황산벌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칠백년의 한이 맺힌 물새가 날며
일편담신 목숨 끊은 남치마가 애닮구나
아 낙화삼천 몸을 던진 백마강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꿈꾸는 백마강을 따라 불러본다.
황포돛배에 앉아 불러볼 수록 내 마음 더욱 가라앉는다.
저 깊은 물속으로~~~
구드래나루터
구드래나룻터 주변에 피어있는 해바라기와 코스모스
한들 한들
바람에 흩날리듯 지천에 피어있는 코스모스
기운 없이
피어있는 모습이 너무나 애처롭다.
저 말없이 흐르는
백마강의 아픔을 아는지
오늘만은 활짝핀 코스모가 아니다.
한들한들 활짝 피어있는 너를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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