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여행] 화진포의 아름다움에 빠진 역사의 인물, 김일성 별장, 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
아름다움이란
이념도 뒤로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진 곳
고성의 화진포다.
고성에 가면 꼭 찾아가야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화진포다.
왜 화진포가 유명하냐고
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화진포의 호수도 아름답지만, 뭐니뭐니해도 이념과 사상을 달리하고 목숨을 건 대치상황을 전개한 남과 북 우두머리들이 한곳에 아이러니하게도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유명하다.
이승만 별장
김일성 별장
이기붕 별장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안나오는 인물들이지만 한 곳에 별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화진포의 아름다움을 대변하는것 같다.
강원도 동해안의 최북단
고성의 화진포를 찾아간다.
화진포
동해안 최대의 호수로 둘레가 약 16km나 되며 명사십리에 버금가는 경치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수천 년 동안 조개껍질과 바위가 부서져서 이룩된 호수로 잉어 등 민물고기와 도미, 전어와 같은 바닷물고기가 많아 낚시군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지만 문화재로 지정되어 낚시가 금지되었다. 호수 주위에 피어있는 해당화는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어 고성군의 꽃으로 지정되어 있다.
바닷가의 해수욕장은 동해안에서 모래빛이 하얗기로 유명하며 최적의 해수욕장으로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다.
이승만별장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조선왕조 말 1904년 구국의 밀사로 미국에 갔다가 1910년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서울 YMCA의 학감으로 국민 계몽과 교육에 힘쓰면서 1911년 전국순회 전도 여행 중 이곳 외국인 선교사 별장에 둘러 친교를 맺은 일이 있었다. 일제가 105인 사건을 계기로 이 박사를 체포하려 하자 1912년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1945년에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초대 대통령이 된다.
그후 1950년 6월 25일 남침한 공산군을 국군이 물리쳐 고성을 수복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군인을 격려하며 이곳을 시찰한 것은 1953년 11월 8일로 42년만의 감격적인 재회를 하게 된다. 이때 이대통령은 김동석 방첩대장의 안내로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이 별장을 찾아 휴양지로 정해 동해안의 군사적 요지인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곤 하였다.
약간의 계단을 올라가면
이승만대통령 전시관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를 사진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이 별장은 1954년 위쪽의 기념관 자리에 단층 건물(스라브 27평)로 신축되었으나 1960년 후 방치 철거되었던 것을 1999년 7월, 육군에서 본래 모습으로 현 위치에 복원하여 이대통령의 역사적 자료와 유품을 전시해오다가 2007년 2월에 고성군과 육군복지단에서 위쪽의 육군관사로 사용하던 건물을 보수하여 2007년 7월에 이승만 기념관으로 개관하게 되었다.
전시관 내부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영부인의 모습
이승만대통령의 유족들이 기증한 유품들
집무실
편히 쉬는 곳
이승만대통령 화진포 기념관
이승만별장의 전시실 및 기념관을 둘러보고 화진포설화의 여인을 만나러 간다.
옛날 이 마을에 "이화진"이란 부자가 살았는데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인색하고 성격이 고약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스님이 시주를 왔는데 곡식 대신 소똥을 퍼주었고, 스님은 소똥을 들고 말없이 돌아서 나갔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며느리가 얼른 쌀을 퍼서 스님께 드리며 시아버지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스님은 시주를 받으며 "나를 따라오면서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며느리는 고총고개에 이르러 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돌아보니 이화진이 살던 집과 논밭은 모두 물에 잠겨 호수가 되어 있었다. 며느리는 애통해 하다가 그만 돌이 되어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착한 심성을 가진 며느리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겨 고총서낭신으로 모셨는데 이후로 농사도 잘 되고 전염병도 사라졌다고 한다. "화진포"는 이화진의 이름 "화진"에서 유래되었다. 지금도 청정한 날에는 화진포 한가운데에 잠겨있는 금방아 공이에서 누런 광채가 수면에 비친다고 한다.
달리는 차창너머로 보이는 화진포
화진포 해수욕장
아!
저 물에 빠져버리고 싶다.
화진포의 성(김일성 별장)으로 가는 길
김일성
우리에게 6.25 전쟁의 아픔을 안겨준 장본인.
그러나 별장에 올라 화진포 해변의 아름다움을 보니 왜 여기에 별장을 두었는지 알 수 있겠다.
화진포의 성(김일성 별장)이 건립된 배경을 알아보면
일본 강점기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원산에 있는 외국인 휴양촌을 화진포에 강제 이주시켰으며, 독일 건축가인 H.Weber가 1938년 건립하여 예배당으로 이용하였으며, 해안 절벽 위 송림 속에 우아하게 자리한 모습에서 '화진포의 성(城)으로 불리워졌다.
1948년 이후에는 북한이 귀빈 휴양소로 사용하였고, 당시 김일성과 그의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 등이 묵고 간 적이 있어 지금까지 '김일성 별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의 건물은 6.25전쟁 중 훼손된 건물을 2005년 3월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김정일이 동생과 이 계단에 앉아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과 자리를 표시하여 놓았다
6.25 전쟁 전에는 이곳이 북위 38도선 위라 북한땅이었으나 전쟁 후 남한으로 넘어온 곳으로
당시 훼손된 것을 복원하여 안보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옥상의 전망대
화진포해수욕장의 넓디넓은 바다가 답답한 가슴 시원스레 풀어준다.
다음으로 이기붕 별장으로 간다.
별장은 1920년대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어 사용된 건물로써 해방이후 북한 공산당의 간부휴양소로 사용되어 오다가 휴전이후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씨의 부인 박마리아 여사가 개인별장으로 사용하다가 폐쇄되었다. 그후 1999년 7월 역사안보전시관으로 개수하여 관람객에게 전시하고 있다.
이기붕은
1896년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태어나 1960년 4월 28일 아들 이강석에 의해 권총으로 사살된 일제강점기의 기업인이며 정치인이다.
이승만의 비서, 서울특별시 시장, 국방부 장관, 4대 국회의장직을 역임하였다. 호는 만송(晩松)으로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 이보의 후손으로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다가 임오군란에 연루되어 처형된 이회정의 증손이다.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의 창당을 주도하였으며,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였고,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로 당선되었으나 4.19혁명으로 사퇴하고 자유당, 국회의장직 마저 제명되었다.
4월 28일 새벽, 경무대 별관에서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중이던 아들 이강석이 권총으로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을 차례로 쏘아 죽이고 자살하여 그의 일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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