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여행] 무릉도원이라 불리는 무릉계곡에 자리잡은 삼화사
강원도 두타산
두타산에는 강원도 국민관광지 1호, 문화재청이 명승 제37호로 지정할 정도로 유명한 무릉계곡이 있다.
무릉계곡을 무릉도원이라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
예부터 시인, 묵객, 고승, 수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무릉도원, 무릉반석이라 넓디넓은 바위와 함께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삼화사다.
삼화사는 신라 선덕여왕때 오대산에 성지를 열고 동해안으로 내려오던 자장율사가 두타산의 산세에 반하여 643년에 절을 세우고 흑련대라 부른것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당시 자장스님은 한을 품고 악신이 된 3명의 여신(女神)을 감화시켜 이들의 도움으로 절을 짓게 되었는데, 세 여신이 화합 발심하여 창건한 절이라 하여 나중에 절 이름을 삼화(三和)라하고 마을 이름도 삼화동이라 불렀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두타산의 무릉계곡을 가면서 누구나 한번쯤을 스쳐 지나갔을 삼화사를 둘러본다.
무릉반석
석장 또는 석장암으로 지칭하기도 한 곳으로 무릉반석은 5천㎡나 되는 넓은 반석이 펼쳐져 있어 주변의 기암괴석과 함께 천하절경을 자랑한다.
반석위에는 이곳을 찾은 명필가와 묵객 등이 음각하여 놓은 여러 종류의 글씨가 있으며, 이중 백미는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이라는 초서체로 크게 새긴 제자로 현세와 이상향을 넘나드는 옛 선인들의 기게와 풍류를 엿볼 수 있다.
투타산 삼화사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일주문
또 다른 창건 전설은
신라 말에 범일국사(사굴산문의 개산조)가 절을 중건하고 삼공사(三公寺)라 칭했는데, 이는 많은 무리를 거느린 3명의 신인이 절터에 모여 무언가 모의한 뒤 떠났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그 자리를 삼공이라 불렀던 데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태조가 신인이 이 절터를 알려준 일을 기념하면서 그 옛날 신성한 왕이 삼국을 통일한 것을 부처님의 영험 덕택이었으므로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해 절 이름을 삼화사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위의 두가지 전설에서 3명의 신인과 연결되어 있고 태조가 이를 삼국통일과 연관시킴으로써 삼화사는 숫자 3가 깊은 인연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용오름길의 전설을 간직한 무릉계곡
천왕문
천왕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가면 앞 마당에 삼층석탑이 서 있고 그 뒤로 높은 계단위에 적광전이 눈에 들어온다.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
삼층석탑은 2층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는 아랫층 기단이 다른 석탑에 비해 비교적 높으며 각면에 2개의 우주와 1개의 탱주를 세웠다. 아래층 기단 갑석은 평평하고 얇고 위층 기단 갑석은 1장의 판석으로 그위에 탑신괴임을 두어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번갈아 가면서 쌓았으며 위로 올라갈수록 서서히 줄어든다.
1997년 적광전 앞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해체하여 복원하였는데 이때 위층 기단안에서 목제함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곱돌로 만든 소형탑 25기, 청동제 불대좌조각 2점, 철조각 6점, 문서를 기록한 종이 1매 등이 들어있는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기단의 구성이나 별도의 석재로 탑신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9세기 후반에 조성된것으로 본다.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
보물 제12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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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사의 중심법당인 적광전
1907년 일본 왜병의 방화로 불에 타 1908년에 다시 세운 건물로 1977년의 이건 때 그대로 옮겨왔으며 얼마전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다가 보물 제1292호로 지정된 철조노사나불좌상을 봉안하면서 적광전으로 편액을 바꿨다.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보물 제1292호)
삼화사 적광전에 모셔져 있는 철불좌상으로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며, 얼굴에는 비교적 살이 올라 통일신라시대의 풍이 엿보인다. 가늘고 길게 뜬 눈, 오똑한 코, 두툼한 입술은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이 도식적이며, 복부까지 속이 드러나 허리띠와 드리워진 매듭이 보인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도록 복원하였다.
복원과정 중 오른쪽 등판면에서 약 10행 161자로 된 글을 발견하였다. 내용에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2번 나와 이 불상의 이름을 알 수 있으며,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880년대에 활약한 결언 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0세기 이후까지 내려오는 이두의 사용과 한자를 국어 어순에 맞추어 배열하는 문장 등으로 미루어 그 당시 국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보물 제12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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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사의 창건과 관련된 내용을 보면
1847년(헌종 13)에 최시영(崔始榮)이 쓴 『두타산삼화사고금사적(頭陀山三和寺古今事蹟)』에서는 고적과 읍지 등의 내용을 인용하여 삼화사의 연혁을 적고 있다.
이 사적에 따르면, 자장조사(慈藏祖師)가 당에서 돌아와 오대산을 두루 돌면서 성적(聖蹟)을 다니다가 두타산에 흑련대(黑蓮臺)를 창건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삼화사이며, 신라 제24대 선덕여왕 11년(643)의 일이라 적고 있다.
이 사적기에서는 고적의 내용을 인용하여, 약사삼불(藥師三佛)인 백(伯)ㆍ중(仲)ㆍ계(季) 삼형제가 서역에서 돌배를 타고 두루 돌아다니다가 동해에 이르러 그들이 타고온 배를 용으로 변화시켜 두타산에 이른 뒤 맏형은 흑련(黑蓮)을 가지고 흑련대(黑蓮臺)에, 둘째는 청련(靑蓮)을 가지고 청련대(靑蓮臺)에, 막내는 금련(金蓮)을 가지고 금련대(金蓮臺)에 머물렀는데, 이들이 각기 지금의 삼화사ㆍ지상사(池上寺)ㆍ영은사(靈隱寺)라 전한다고 하였다.
또한 이 기록에는 고려말에 시어사(侍御史)를 지낸 이승휴(李承休)가 절 가까이에 객안당(客安堂)을 짓고 『제왕운기(帝王韻紀)』을 저술하였으며, 이곳에서 10여 년간 삼화사에 있는 불경을 독파하다가 객안당을 삼화사에 희사하고 간장암(看藏庵)이라는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이처럼 삼화사는 범일국사 창건설과 자장율사 창건설이 전하고 있는데, 현재 사찰에서는 자장스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또한 삼화사에는 우리나라 근대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나라의 주권을 잃게 된 데 분노한 삼척지방의 의병들이 봉기하여 삼화사를 거점으로 삼게 되자, 1907년 왜병들이 대웅전ㆍ선당 등 200여 칸에 달했던 사찰건물을 모두 불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듬해인 1908년에 승려와 마을민들이 합심하여 다시 대웅전ㆍ칠성당ㆍ요사채 등을 새롭게 세웠다. 현재의 삼화사는 1977년 쌍용양회 동해공장의 채광석권에 속하게 되어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는데, 1908년에 중건된 건물들을 모두 그대로 옮겨왔다.
극락전
최근에 지어진 전각으로 옛 대웅전에 모셨던 불상과 불화들을 옮겨 봉안하고 있다.
칠성당
법당의 내부에는 칠성, 독성, 산신 등의 3점의 불화를 봉안하고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자료 참조)
동해 삼화사 소장『덕주사본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6호
(문화재청 홈페이지 자료 참조)
동해 삼화사 소장『갑사본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56호
삼화사에 내려오는 전설을 옮겨본다.(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삼화사편 참조)
신라 서라벌에 진골 출신의 아름다운 세 처녀가 있었는데, 이들은 집안어른들끼리 왕래가 잦고 가깝게 지내는 사이었으므로 절친하게 지냈다. 혼기를 맞은 그녀들이 신랑감을 고를 무렵, 신라와 백제 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때 청년장수 김재량은 전쟁에 나가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와 왕궁에서는 김재량을 위해 축하연을 열었는데, 공교롭게도 세 처녀가 모두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김재량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세 처녀를 본 그 날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고, 처녀들 또한 김재량을 사모하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이윽고 그녀들은 각자의 시녀를 통해 연정을 전하기에 이르렀고, 김재량은 뛸 듯이 기뻐하며 하나도 아닌 세 처녀를 번갈아가며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소문은 널리 퍼지게 되어 세 처녀는 좋은 친구 사이에서 서로 질투하고 적대시하는 사이로 변했다. 그러던 중 신라는 고구려와 전쟁을 하게 되어 다시 전쟁터로 나가서 많은 공을 세우고 돌아오던 김재량이, 그만 고구려군 첩자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김재량을 너무도 사랑했던 세 처녀는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어 모두 산으로 들어가 두타고행을 하여 마침내 여신이 되어, 산이름도 두타산이라 칭하게 되었다.
나림여신ㆍ혈례여신ㆍ골화여신이 된 그들은 신력을 갖추고서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는지 김재량의 죽음을 서로의 잘못으로 미루며 저주했고, 그곳 주민들이 산에 치성을 드리지 않으면 노여워하며 재앙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대산에 성지를 개산하고 동해안으로 내려오던 자장율사(慈裝律師)가 두타산의 산세에 감격하여 그곳으로 향했다. 이때 자장율사를 본 나림여신은 자신의 도를 시험하는 한편 스님이 산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여 스님을 유혹했다.
“스님,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이 산의 산세가 하도 좋아 절을 창건할 인연으로 찾으러 왔소.”
“참으로 거룩하십니다. 저도 따라가고 싶사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산길이 험하고 힘들 것이니 훗날 절이 세워지거든 오시지요.”
여인의 동행을 거절한 자장스님은 초가을 달빛이 교교히 흐르는 산길을 삼경이 가깝도록 걸었다. 문득 인기척이 나는 듯싶어 뒤를 돌아본 스님은, 먼발치에 여인이 뒤따르고 있는 것을 보고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은 모르는 척 걸음을 재촉한 뒤 골화전에 이르러 외딴 주막집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하룻밤 유숙하기로 했다. 어느새 따라 들어온 여인은 스님이 계신 방에 주안상을 들고 들어왔다.
“목이 컬컬하실 텐데 우선 한 잔 드시지요.”
잠시 대답이 없던 스님이 말문을 열었다.
“여인이여, 당신은 지금 신력을 얻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를 유혹하는구려. 자신의 몸뚱이가 더러운 물건을 싸가지고 다니는 것인 줄 모른다면 이는 전도된 인생이오. 그 정도의 신력을 얻었으면 좀더 공부하여 열반의 세계에 안주토록 하시오.”
나림은 스님의 법문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스님! 제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앞으로 깊은 불법을 일러주십시오.”
“나림 여신이여! 참으로 장한 발심입니다.”
“어떻게 제 이름을…?”
“내가 잠시 선정에 들어 관(觀)하여 보았다오.”
나림은 감동하여 그 시각부터 스님에게 귀의하고, 곧 처소로 돌아와 혈례와 골화 여신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함께 귀의할 것을 권했으나 두 여신은 비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까짓 스님 하나 유혹 못하고 오히려 매수당하다니 우리 여신들의 체통이 말이 아니로군. 우리 둘이 함께 가서 혼을 내주고 이곳에 절을 짓지 못하게 하자. 만약 절을 세우면 주민들이 우리에게 공양을 올리지 않을 테니까.”
“그 참 좋은 생각이구나.”
혈례와 골화는 즉시 호랑이로 변신하여 자장스님 앞에 나타나 길을 막았다.
“이런 무례한 노릇이 있나. 아무리 축생이기로서니 스님의 길을 막다니, 어서 썩 물러가거라!”
“어흐흥!”
호랑이들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 기세를 보이자 스님은 금강삼매에 들어 몸을 금강석같이 굳혔다. 한 마리는 발톱으로 스님을 내리쳤고 또 한 마리는 스님의 옆구리를 물었으나, 사납게 달려든 호랑이는 발톱과 이빨만 다치고 말았다. 호랑이는 더욱 화가 나서 맹렬히 달려들다가 결국은 꼬리를 사리면서 도망치고 말았다. 이때 스님이 주문을 외우니 큰 칼을 든 금강역사가 나타나 도망치는 호랑이를 한 손으로 잡아왔다.
“자 이제 너희들의 본색을 드러내거라.”
어쩔 수 없이 본 모습으로 돌아간 여신들은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들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잘못을 알았으면 두 번 다시 그런 죄를 범하지 말도록 하시오. 미움과 시기, 질투는 모두 욕심에서 비롯되니 오늘부터 욕망의 불을 끄는 공부를 하여 이미 얻은 신력으로 중생을 이익하게 하시오.”
이때 언제 왔는지 나림여신이 와 있었다.
“스님, 스님의 원력으로 우리 모두 발심하게 되었음을 깊이 감사드리며 제가 앞장서서 금당 자리를 안내하고 스님을 도와 사찰 창건에 동참하겠습니다.”
자장율사는 나림여신이 인도한 장소에서 불사를 시작하니 세 여신은 장사로 변하여 무거운 짐을 나르고 마을주민들이 힘을 모아 절은 쉽게 세워졌다. 그 후 세 여신이 화합 발심하여 창건한 절이라 하여 이 절을 삼화사(三和寺)라 명했고 마을이름도 삼화동이라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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