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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여행] 양생과 여인의 사랑이야기(만복사저포기)가 전하는 남원의 만복사지

들꽃(野花) 2013. 1. 6. 22:44

[남원여행] 양생과 여인의 사랑이야기(만복사저포기)가 전하는 남원의 만복사지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만복사

"전라도 남원에 살고 있는 양생(梁生:양씨 성을 가진 서생)은 일찍이 어버이를 여윈 뒤 여태껏 장가를 들지 못하고 만복사(萬福寺)의 동쪽 골방에서 홀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로 시작되는 김시습의 최초 한문소설에 나오는 만복사저포기의 무대로 알려져 있는 사찰이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려 석조대좌, 당간지주, 오층석탑, 석조여래입상 등의 불교관련 유적들만이 너른 들판에 있을뿐이다.

 

만복사는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 문종 때 지어진것으로 전한다.

동국여지승랑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에 창건되었고 오층불전과 이층불전이 있으며 그 안에 길이 35척( 약 10M)의 동불이 있다"라고한다. 

이러한 자료들로 보아 당시에는 대웅전, 약사전, 장륙전, 영산전, 보응전, 천불전, 나한전 등 많은 건물들과 수백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으나 정유재란(1597) 떼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버렸다고 한다.

 

만복사지는 사적 제349호로 지정되었고 절터에 있는 오층석탑(보물 제30호), 석조대좌(보물 제31호), 당간지주(보물 제32호),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3호) 등이 있다.

 

 

 

 

금오신화는

조선초기에 김시습이 지은 한문단편소설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다. 완본은 전하지 않으며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등 5편이 전하고 있다.

만복사저포기는 살아있는 양생과 죽은 혼령인 여인의 사랑이야기를 내용으로하는 영혼 소설로 초현실적, 환상적 이야기다. 

 

만복사저포기의 줄거리

남원에 사는 노총각 양생은 어느날 만복사의 불당에 찾아가서 부처님께 저포 놀이(주사위 같은 것을 나무로 만들어 던져서 그 끝수로 승부를 겨루는 놀이로 윷놀이와 비슷하다.)를 청했다. 

그가 지면 부처님에게 불공을 드릴것이요, 부처님이 지면 그에게 아름다운 배필을 중매해 달라고 부탁하는 내기였다. 양생은 두 번 저포를 던져 이기고, 불좌 밑에 숨어서 배필이 될 여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마침 아름다운 아가씨가 나타나 부처님 앞세 자신의 외로운 신세를 하소연하면서 좋은 배필을 점지해달라고 기원하였다. 이를 본 양생이 그 여인 앞으로 뚜어나가 회포를 말하니 두 사람은 정이 통해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이튿날 여인은 양생에게 자기가 사는 동내로 가기를 권했고, 양생은 거기서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사흘 뒤 그가 돌아가게 되었을 때 여인이 양생에게 신표로서 은잔 한 개를 주면서 보련사를 가는 길목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다.

다음 날 여인이 시킨대로 보련사 길목에 서 있던 양생은 여인의 부모님을 만나게 되고 여인이 인간이 아니라 왜구가 침번한 난리통에 죽은 처녀의 환신이었음을 알게 된다.

여인을 다시 만난 양생은 보련사에서 여인과 하룻밤을 보낸 후 여인을 위한 재를 올리고 두 사람은 영원히 이별하게 된다. 양생은 끝내 그 여인을 잊지 못하여 장가도 가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서 약초를 캐면서 종적을 감추었다.

 

 

 

 

매월당 김시습(1435년~1493년)은

조선초기의 문인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강릉으로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 동봉, 벽산청은, 췌세옹, 법호는 설잠이다. 충순위를 지낸 김일성의 아들이다. 세조 복위와 관련된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생후 8개월에 글자를 터득하였으며 3세에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한시를 지었다고 한다. 신동으로 세종에게 칭찬을 받기도 한 천재였으며 5세 때 세종으로부터 단종이 너희 임금이 될것이라는 말을 듣고난 뒤, 그는 평생 단종을 정신적 지주로 생각했다.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 들어가 학문을 닦다가 단종 폐위 후 3일간 통곡을 하였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서울 노량진에 암장했다고도 한다. 말년에 부여의 무량사에서 입적했다.

언제가 서강을 여행하다고 한명회의 시를 보고 운을 바꾸어 조롱한 시가 있어 옮겨본다.

한명회시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김시습시

   靑春社稷(청춘사직 :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白首江湖(백수강호 :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

 

 

2008년 5월의 만복사지

겨울날의 마른 잔디를 보다가 옛 사진의 푸른 잔디를 보니 눈이 푸르르해서 좋다. 

 

 

보물 제32호 남원 만복사지 당간지주 (南原 萬福寺址 幢竿支柱)

절에 행사가 있을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고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으며, 지주사이에 세웠던 깃대는 남아있지 않고 이를 고정시켰던 구멍이 세 군데에 뚫려 있다.

현재 아래부분과 기단이 땅속에 파묻혀 있어 그 이하의 구조는 알 수 없다.

두 지주 각 면이 고르지 못하여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별다른 장식이 없으며,

전체적으로 생략화·단순화된 것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당간지주의 중앙 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뭔가 툭 튀어나온 것을 볼 수가 있을것입니다.

제가 갔을 때는 저것이 무엇인지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오늘 만복사지를 찾으니 예전에 없던 석인상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네요.

바로 그 석인상이랍니다. 

 

 

석인상은

당간지주 남쪽으로 약 4m 떨어진 곳에 2기가 나란히 있었으나

도로변에 노출되어 있어 사고의 위험이 높은 1기의 석인상을 이곳으로 옮겼다.

석인상은 사각형의 돌기둥에 3개의 면만을 사용하여 사람 형상을 조각하고 나머지 한 면은 편평하게 다듬었다.

다듬은 면에는 두 개의 구멍이 확인되는데,

위쪽 구멍은 머리 정상부에서 아래쪽으로 122cm, 두 번째 구멍은 318cm 내려온 곳에 있다.

 

석인상의 머리부는

정상부가 둥글고 볼록하게 솟아있으며, 얼굴은 안구를 심하게 돌출시켜 분노의 모습을 띠고 있다.

오른손은 완전히 구부려 주먹에는 그 성격이 불분명한 물건을 쥐고 있다.

군의는 허리부분에서 묶어 상단부 옷자락이 밖으로 뒤집혀 늘어뜨렸으며, 옷주름은 굵은 물결무늬를 선명하게 돌출시켰다.

하반신은 수직으로 늘어뜨린 옷주름에 가려졌고 다리부분은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다리의 아래쪽은 대좌를 사용하지 않고 사각형의 돌기둥을 뽀족하게 다듬었다.

석인상의 전체 높이는 550cm이며, 머리위에서 다리끝까지의 길이는 370cm 내외이다.

 

 

 

 

 

보물 제31호 남원 만복사지 석조대좌 (南原 萬福寺址 石造臺座)

석조대좌는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으로 거대한 하나의 돌로 상·중·하대를 조각하였는데 육각형으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하대는 각 측면에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장식했으며, 윗면에는 연꽃모양을 조각하였다.

중대는 낮으며, 짧은 기둥을 본떠 새겼다.

상대는 중대보다 넓어지고, 평평한 윗면 중앙에 불상을 끼웠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진 구멍이 뚫려 있다.

옆면에 연꽃이 새겨졌던 부분은 주변 전체가 파손되었다.

이 작품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에서 벗어난 6각형이며, 안상 안에 꽃을 장식한 것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양식으로,

11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대석 

이 대석은 목탑지 중앙에서 12.1m 남쪽 지점 즉 중문지와 목탑지의 가운데 지점에 위치한다.

1개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동서 120cm, 남북 115cm 사각부분을 정방향으로 만든 뒤

그 위에 일변 43cm 크기의 팔각을 돌출 구획하고 각변에 복엽연화문을 양각하였다.

상면 가운데는 간주를 끼우기 위해 직경 20cm의 구멍을 파 놓았다.

연화문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만복사 창건 당시부터 이곳에 위치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탑신은 오간데 없고 옥개석만이 삼층으로 있다. 

 

 

보물 제30호 남원 만복사지 오층석탑 (南原 萬福寺址 五層石塔) 

고려시대에 승려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탑이다.

원래 이곳에는 절터 중앙에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많은 건물지와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현재 탑은 4층까지만 남아있고, 5층 이상은 모두 없어졌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는 기단부(基壇部)는 땅에 파묻혀 있는데,

이는 훗날 이 지역의 땅바닥이 높아졌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대단히 높고 2층 이상은 약 3분의 1로 크기가 줄어 들었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고, 지붕돌은 밑면 전체가 위로 들려 있어, 마치 목조건축의 지붕을 보고 있는 듯하다.

특이한 점은 각 지붕돌 위에 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네모난 돌이 끼워져 있는 것으로, 당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이 탑은 고려 문종 때인 11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1968년 이 탑을 보수하다가 탑신의 1층 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5월의 만복사지 

 

 

 

 

 

보물 제43호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 (南原 萬福寺址 石造如來立像) 

 

전라북도 남원시 만복사 절터에 서 있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2m의 불상이다.
민머리의 정수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둥글게 솟아 있다.

살이 오른 타원형의 얼굴은 눈·코·입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함께 원만한 인상을 보여준다.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는 곡선, 몸의 굴곡 등도 아주 원만하고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둥근 칼라와 같은 독특한 옷깃의 접힘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둥근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팔은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팔은 아래로 내려서 역시 손바닥을 보이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손은 따로 끼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이루어져 있으며 굵은 선으로 구분되고 있다.

윗부분이 없어진 머리광배에는 활짝 핀 연꽃잎과 연꽃줄기가 새겨져 있고, 몸광배에는 연꽃줄기만이 새겨져 있다.

이들의 바깥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좌우에는 각각 2구씩의 작은 부처가 들어 있다.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은 얼굴이나 몸 등에서 매우 원만하고 부드러운 성격이 드러나 있지만 옷주름이나 몸의 자세는 다소 부자연스러운 면이 보인다.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쇠퇴해가는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광배 좌우에 작은 부처가 하나씩 보인다. 

 

 

뒷면에 조각되어 있는 부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