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꽃의 문화재답사/시도유형문화재

[문화재답사/제주] 홍화각기 -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15호

들꽃(野花) 2013. 5. 6. 06:00

홍화각기 (弘化閣記) /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15호

소재지 : 제주 제주시  이도1동 1313.(제주 삼성혈)

설  명 :

  홍화각기(弘化閣記)는 홍화각(弘化閣)등 관아(官衙) 건물의 건립 전말을 판각한 기문(記文)이다.

  제주목 관아가 모두 불탄 뒤 세종 17년(1435)에 최해산(崔海山) 안무사가 홍화각 등 여러 건물을 다시 지었는데『홍화각기(弘化閣記)』는 바로 그 간의 경위를 밝히기 위해 고득종(高得宗)이 지은 글이다.


  그 기문(記文)의 일부를 인용해보면, "공(公)(최해산(崔海山))이 정사(政事)가 성취되고 인심이 화하여지자, 관우(館宇)의 허물어진 것을 수축하려고 폐허가 되어버린 절의 재목과 기와를 가져다가 먼저 거처하는 집을 일으키니, 거문고 타는 당(堂)과 욕실·부엌·랑사(廊舍)의 위치가 갖추어졌다. 조금 서편으로 집 한 칸을 세워서 당(堂)을 만들고, 또 그 서쪽에 집 세 칸을 세우고 겹처마로 보충하니, 그 규모가 굉걸하고도 정밀하고 그 제도가 웅장하고도 화려하였다. 그 남쪽에 반랄(半剌)(판관(判官))의 당(堂)을 세우고 그 북쪽에는 나라에 바치는 말의 마구간을 두고 동쪽에는 창고를 두고 서쪽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또 그 남쪽에 문루(門樓)를 지어 아래로는 드나들게 하고 위에는 종과 북을 달았고, 약(藥)창고와 기(旗) 두는 곳이 동서에 서로 대하여 모두 서 있다. 모두 담으로 둘렀으며, 집이 도합 2백 여섯 칸인데, 집들이 서로 연접(連接)하지 않은 것은 화재를 예방한 것이다. 그 경영과 위치와 제작이 정당함을 얻은 것은 모두 공(公)의 지시와 규획(規劃)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홍화각(弘化閣)'이라 한 현액(縣額)은 "무릇 임금의 근심을 나눈 자가 날마다 이집에 올라서 편안히 놀지도 말고 방종히 하지도 말아서 맡은 직책을 다하기를 생각하여, 항상 왕화(王化)를 넓히고(홍(弘)), 백성의 사정을 상달(上達)시키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제주 백성들이 무궁하게 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홍화(弘化)라고 이 집을 이름하지 않으랴"고 하여, 성군(聖君)의 덕을 온누리에 널리 알리고 덕화(德化)로써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


  글 전체의 내용은 제주도의 지형과 역사를 간략히 서술한 뒤에 최해산의 인품과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것을 찬양하고, 다음으로 홍화각의 건립 내력과 홍화각이라 명명(命名)한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또 ‘홍화각(弘化閣)’이라는 제액(題額) 세 글자도 고득종 자신이 직접 써서 게시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현재 '홍화각기(弘化閣記)' (263×67.5㎝)와 '홍화각(弘化閣)' (163×65.6㎝) 액자는 모두 고양부(高梁夫) 삼성사재단(三姓祠財團)에 소장되어 있다.

 

 

 

 

 

 

 

 

 

 

 

제주 삼성혈

 

전시관

 

 

홍화각기를 쓴 고득종에 대하여 살펴보자.

 

고득종은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자전(子傳), 호는 영곡(靈谷). 순원(順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걸(臣傑)이며, 아버지는 상장군 봉지(鳳智)이다.

1413년(태종 13) 효행으로 천거받아 음직으로 직장(直長)이 되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대호군(大護軍)·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등을 거쳐, 1427년(세종 9)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37년 첨지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호조참의로서 종마진공사(種馬進貢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9년 통신사가 되어 부사 윤인보(尹仁甫), 서장관 김몽례(金夢禮)와 함께 일본에 가서 아시카가(足利義敎)와 오우치(大內持世)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돌아왔다.

1441년 예조참의로 다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그때 함부로 약재를 청하고, 또 이만주(李滿柱)와 동범찰(童凡察)의 처치를 요구한 일로 귀국 즉시 강음현(江陰縣)에 유배되었다.

2년 후 풀려나와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1448년 도전운사(都轉運使)가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의 쌀을 평안도로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사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저술이나 작품이 전하는 것은 없고,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몇 편의 시가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지금 고득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는 이유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그의 시가 나오기 때문이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노닐면서 본 무릉도원의 모습을 안견으로 하여금 3일 동안에 그리게 한 작품으로, 안평대군이 그림의 내력을 쓰고, 신숙주가 서문을 지었다. 이어 많은 문사(文士)들이 이에 화답했는데 제주인 고득종 또한 '몽유도원도찬양 칠언장편시'를 지었다. 문사들은 저마다 안견의 그림을 보고 자신의 감흥을 술회하였고, 거기에 자신의 필적으로 그 흥취를 남겼다. 이 그림에 화답한 시를 쓴 사람은 모두 21명으로 신숙주·이등·하연·송처관·김담·고득종·강석덕·정인지·박 연·김종서·이 술·최 항·박팽년·윤자운· 이 예·이현로·서거정·성삼문·김수온·천봉만우·최 유 등이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제발(題跋)과 당시의 쟁쟁한 정치가와 문인들의 필적이 있다는 것 때문에 희대의 보물로 여겨지고 있다.

 

(서산의 안견기념관에 있는 몽유도원도와 고득종의 시가 있어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