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여행

[수원여행] 사도세자, 아버지의 능원을 찾아 떠난길에 찾는 화성행궁

들꽃(野花) 2013. 6. 20. 06:30

[수원여행] 사도세자, 아버지의 능원을 찾아 떠난길에 찾는 화성행궁

 

화성행궁

행궁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 휴양, 능원 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로 거쳐하는 곳을 말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행궁은

크게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를 계속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고, 휴양을 목적으로 한 충남의 온양행궁이 있다. 온양행궁은 조선 세종이래 역대 왕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리고 임금이 지방의 능원을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있는데 바로 화성행궁이다.

 

오늘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찾았던 정조가 머물던 화성행궁을 찾아본다.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서 정조 임금의 장용영 군대의 무예24기 시범을 구경하고 화성행궁을 둘러본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화성을 축조하였으며, 1790년에서 1795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창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중 오늘 찾은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는 행궁이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가 집무하는 내아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을 거행하였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그중

제6차 현륭원 능행 때인 정조 19년 윤 2월 11일에 화성에 도착하여 다음날인 12일에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자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성대한 진찬례를 배푼것을 비롯하여 낙남헌에서 베푼 양로연과 몇 차례의 문 · 무과 별시, 등중에서의 어사와 배사 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신풍루에서 베푼 빈민에 대한 친임사미, 그 밖에 수원부와 인접 민인들에 대한 급복 · 진휼 등 각종의 특별조치를 자주 내린 바 있다.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신풍루는 정조 13년 누문 6칸을 짓고 '진남루'라 편액했던 것을 정조 18년 남 ·북 군영을 설치하고 좌우각간 21칸을 추가하여 17칸의 규모를 이루었다.

여기에서 '신풍'이란 이름은 한고조의 발상지인 풍패(흔히 풍패지경이라고 함)에서 유래된 것으로 '신풍'은 바로 정조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무예24기 시범공연

정조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24가지 실전무예를 시범을 보여주고 있다.

 

[행사안내]

○ 일 시 : 1월 ∼ 12월 (매주 화~일요일) 11:00, 15:00
○ 장 소 : 화성행궁 신풍루
○ 내 용 :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24가지 실전 무예 시연
○ 무예24기의 구성
    - 무예도보통지 제1권 : 장창ㆍ죽장창ㆍ기창ㆍ당파ㆍ낭선ㆍ기(騎)창
    - 무예도보통지 제2권 : 쌍수도ㆍ예도ㆍ왜검ㆍ교전
    - 무예도보통지 제3권 : 제독검ㆍ본국검ㆍ쌍검ㆍ마상쌍검ㆍ월도ㆍ마상월도ㆍ협도ㆍ등패
    - 무예도보통지 제4권 : 권법ㆍ곤방ㆍ편곤ㆍ마상편곤ㆍ격구ㆍ마상재
○ 문의 : 수원문화재단 관광공연팀(031-290-3634

 

 

 

중양문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활을 하는 내삼문이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하였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곳이다.

 

 

 

 

소원을 빌어볼까요?

금방이라도 말라 죽을 것 같지만 매년 저렇게 새 잎이 돋아나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소원을 비는 곳으로 유명하다.

 

 

 

 

화성행궁에서는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각종 체험을 즐기면서 우리 전통을 알고 익히는 체험코너를 상시 운영하고 있다.

 

 

 

민속전통체험으로 솟대만들기 체험을 즐길 수 있다.

 

 

화성행궁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는 꼬마 학생들

 

 

 

 

[스탬프찍기]

화성행궁을 관람하는 관광객들에게 화성행궁의 모든 장소를 꼼꼼히 살펴 볼  수 있도록 준비한 체험으로 꼬마 학생이 스탬프를 힘있게 찍고 있다다.

 

 

 

봉수당 좌측에 사람들이 모여 있네요.

살짝 들여다 볼까요?

 

 

 

정조의 어머니, 사도세자의 비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봉수당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전 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장남헌이라고도 한다. 

정조 19년 혜경궁 홍씨의 주갑년을 맞아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다시 '봉수당'으로 편액했다.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면 "만년의 수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파괴되었던 것을 1997년에 복원하였다.

 

"봉수당은 곧 나의 자궁(慈宮)을 받들어 잔으로 수(壽)를 드리는 곳이며 , 장락당은 대게 한나라의 궁실 이름에서 취한곳이지만 내가 곧 머무는 곳이니라."

 

 

 

 

 

 

 

노래당과 낙남헌

 

 

 

 

 

노래당((老來堂)

낙남헌과 득중정에서 펼쳐지는 각종 행사중에 휴식을 취하기 위한 건물이다.

노래당은 늙은 뒤에 돌아오겠다는 정조의 의지가 담긴 건물이다.

노래(老來)란 말은 '늙은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거처하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백거이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정조가 화성에 내려와 혜경궁을 극진히 모시겠다는 것을 잘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정조가 순조에게 양위하고 내려와 머물려 했던 건물이다.

 

 

 

 

낙남헌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는 꼬마 관람객

 

 

 

낙남헌은

일제 때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 있는 건물로

낙남헌이란 이름은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이라 한 것에서 따온것이다.

화성의 축성을 기념하고자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다.

 

 

 

 

 

화령전(사적 제115호)

정조의 유지를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정조의 영전이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달리 영전은 보통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생전에 계실 때와 같이 봉안하는 곳이다.

 

화령전은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한 후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만든 어진봉안각이다.

정조의 초상화는 평생 세차례 그려젔는데 화령전에는 군복입은 초상화를 모셨다.

 

화령전은 화성에서 '화'자를 다고,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에서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 '귀령부모'에서 '령'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운한각

화령정의 정전으로 정조의 초상화를 봉안한 건물이다.

운한은 은하수를 말하는 데 시경 대아 탕지십 운한 첫 구절에 "환한 저 은하수가 하늘에 밝게 둘러 있네"라고 한데서 따왔다.

운한각 앞에는 제사 때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월대가 있고, 세 개의 계단이 놓여있다.

가운데 계단은 혼백만이 사용하는 계단이다.

 

 

 

 

정조의 초상화

 

 

 

화성행궁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6-2번지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