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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여행] 경내 사당과 서원이 있는 호국정신을 계승한 호국불교의 명찰-밀양 표충사

들꽃(野花) 2013. 11. 16. 14:31

[절집여행] 경내 사당과 서원이 있는 호국정신을 계승한 호국불교의 명찰-밀양 표충사

 

밀양 표충사

무더위가 한풀 꺽이는 8월의 끝 자락에 남쪽으로 길을 떠난다.

가야지 하면서 가보지 못한 곳,

그중 밀양이 있었으니 언제가는 갈 수 있을거야 하면서 위안을 삼고 있었는데 그 위안을 덜고자 밀양으로 길을 나선다.

 

밀양의 표충사

가고 싶은 곳중 하나의 표충사

오전에 만어사에서 정상을 항해 올라가는 만마리의 물고기들을 보고 표충사로 길을 잡는다.

표충사

일반 사찰과는 뭔가 다르게 느낌이 오는 것은 아마도 경내에 유교의 상징인 사당과 서원이 있어서가 아닐까?

어떤 사연으로 절 안에 사당과 서원이 있을까?

그 속으로 들어간다.

 

표충사는 사기에 의하면 654년(진덕여황 8년) 원효대사가 삼국통일을 기원하고자 창건하고 죽림사라 했으며, 829년(흥덕왕 4년) 인도의 고승인 황면선사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할 곳을 동방에서 찾다가 황록산 남쪽에 오색 서운이 감도는 것을 발견하고는 3층 석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했다.

 

서기 829년 신라 흥덕왕 4년에 왕의 셋째 왕자가 몹쓸 병을 얻어 전국의 명산과 명의를 찾던 중 이곳의 약수를 마시고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쾌유되어 왕이 친히 찾아와 크게 칭송하니 선사가 말하기를 "이곳 유수와 산초가 모두 약수요, 약초아님이 없습니다."라 말하니 왕이 기뻐하고 절 이름을 재약산 영정사(載藥山 靈井寺)라 명명하고 절을 크게 부흥 시켰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임진왜라 때의 의승대장인 서산·사명·기허 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표충서원을 사찰 안에 둠으로써 표충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표충사의 창건에 대해 살펴보면

절에 전해져 오는 『재약산영정사고적(載藥山靈井寺古蹟)』에 의하면 사찰의 창건은 829년(신라 흥덕왕 4)의 일이며, 다음과 같은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흥덕왕 4년경) 한 서역의 승려가 이 고장에 왔는데, 사람들은 그를 황발선인(黃髮仙人)이라 하였다. 당시 이곳사람으로 고질병을 앓는 이가 있어 병을 고칠 방도를 스님에게 가르쳐주길 빌었던 바, 한 샘물을 가리키며 물을 마시라고 하였다. 이에 그 물을 마시자 씻은 듯이 병이 나았고, 이러한 영험에 탄복한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앞 다투어 희사함으로써 웅장한 절을 창건하게 되었는데, 산명을 재약(載藥), 사명을 영정(靈井)이라 했다.”

 

또한 1857년(철종 8)에 구봉(九鳳) 스님이 조선 영조 때 남붕(南鵬) 스님이 지은 『태허록(太虛錄)』을 인용하여 기록한 창건연기에는, 신라의 태자가 병으로 이곳 산중에 들어와 어느 노선사에게 약을 구했는데, 근처에 있는 샘물을 마시도록 하므로 그대로 따랐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는지라 부왕(父王)에게 아뢰어 그 선인을 위해 이곳에 절을 짓고 '재약산영정사'라 했다는 일설도 있다.

 

 

 

표충사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주변을 둘러보니 울창한 산림이 둘러싸여 있고, 표충사에는 높게만 느껴지는 담장이 시야를 가로막고 서 있다.

 

 

표충사 경내를 들어가는 길

아직은 더위를 피해 그늘을 따라 경내로 들어간다.

 

 

 

표충사

임진왜란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었으나 1610년(광해군 2)에 혜등스님에 의해 금당을 건립을 시작으로 중건과 신출 보수를 거치면서 가람이 크게 확장되었다.

영정사의 전성기에는 8법당, 4지전, 17선방에 이르는 건물과 15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다고 한다. 이때  사찰의 재정도 풍부하여 사찰에서 큰 대나무밭을 소유함으로써 관죽전(官竹田)으로 지정받다 대나무를 생산하여 관청에 바쳤으며 이로 인해 죽림사라는 별칭이 생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불교가 쇠태한 조선후기에 이르렀는데 1830년(헌종 5)에 사명대사의 8세손인 월파스님이 표충사를 옮겨와 사당이름을 표충서원으로 바꾸고 절이름도 영정사에서 표충사로 고치면서 다시 한번 부흥을 맞이하게 되었다.

1926년 화재로 응진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재약산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표충사

재약산이란 이름은 표충사 경내에 있는 영정약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신라 흥덕왕 셋째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약을 찾던 중 영정약수로 치유하자 산 이름을 재약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재약산은 영산으로 신라시대 때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주도적 역활을 했던 화랑들이 호연지기를 연마했던 수련장이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훈련시키며 호국정신을 계승한 호국불교의 본산이다.

 

 

 

오른쪽의 설법전

현재 사명대사의 호국사상을 선양하기 위한 법회를 열어 그 정신을 전승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설법전이란 편액 외에 무설전ㆍ의중당ㆍ대흥불법도량의 편액을 함께 걸고 있으며, 내부에는 금동관음보살좌상이 1구 봉안되어 있다.

 

 

 

 

표충사의 중문격인 수충루

수축루의 누각 아래에 문을 설치하여 사찰의 진입공간을 마련하였다.

누각의 중앙칸에는 '表忠寺(표충사)’ 편액을 걸고, 좌우칸에는 호국성사의 충혼을 상징하는 ‘수충루(酬忠樓)’라는 편액을 걸고 있다.

수충루는 밀양시 교동에 있는 밀양향교 풍화루와 부북면 후사포리에 소재한 예림서원 독서루와 더불어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서원의 정문 형태로 된 누각이다.

 

 

 

사찰안에 자리잡은 표충사

1839년(헌종 5)에 이건하면서 대광전 옆 지금의 팔상전이 있는 곳에 위치해   표충서원이란 이름으로 있었으나 이후 1971년 팔상전과 자리를 바꾸었으며, 최근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어 표충사라고 편액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편액이 절 이름과 같은 표충사라는 것이다.

바로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절 이름인 표충사는 한자로는 (表忠寺)라 쓰지만 사당인 표충사는 (表忠祠)라 쓰는 것이 다르다.

즉 지금보고 있는 건물은 사당이란 것이다.

 

 

표충사안에 모셔져 있는 서산, 사명, 기허 대사의 영정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을 도와 의승병을 일으켜 평양성 탈환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나라를 구하고자 서생포 가등청정의 적진으로 네차례나 회담을 하기 위해 들어 갔고 1597 정유년 외장 가등청정이 "조선에 국보가 있느냐?"고 묻자 "가등청정 당신의 목이 바로 조선민족의 국보다."하고 할을 하며 적장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1604년 2월에 스승이신 서산대사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국서를 받들고 8월 일본으로 탐적사(강화정사)로 가서 8개월 동안 각고의 노력끝에 포로로 잡혀간 동포 3,000여명과 함께 귀국하는 등 외교적 업적을 남겼다. 그 해 6월에 선조에게 복명하니 가의대부(嘉義大夫) 영의정을 하사 받았으나 3일 만에 관직을 사양하고 그 해 10월에서야 스승이신 서산대사의 영정에 분향 참배하고 다시 합천 해인사에 들어가 결가부좌한 채 무량선정에 들다가 광해군 2년(1610) 열반에 드시니 법랍 51년 세수 67세이며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 하다.
당시 조정에서는 국장으로 장례를 지내고 밀양 표충사(祠)와 묘향산 수충사(祠)에 서원 편액을 내리며 유교식 제향으로 봉행토록 했다. 

숭유억불 조선시대의 당시 사회로서는 승려에 대한 파격적인 예우였던 것이다. 또한 사명대사가 태어났던 밀양 무안면에 표충사당과 표충비 이를 수호할 표충사를 지었다.

기허대사

속명은 영규, 법호는 기허당이며, 계룡산 갑사에 출가하여 휴정(休靜)대사의 고제(高弟)로 공주(公州) 청련암에서 수도하였으며 선장(禪杖)으로 무예를 익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명의 승병을 모아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를 수복하였다.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 금산(錦山)에서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격전 끝에 조헌 등 700의사(義士)와 함께 순국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승병을 일으켜 전국의 승병들이 궐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금산의 700의총(義塚)에 묻히고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다. 법도(法徒) ·대인(大仁) 등에 의하여 진락산(進樂山)에 영각(影閣)이 세워졌으며, 의선(毅禪)이란 편액(扁額)이 하사되었다.

 

 

 

근래에 새롭게 건립된 유물관으로

이곳에는 국보 제75호인 청동은입사향완을 비록하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유물 및 사명대사의 유품 300여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 16건 79점의 사명대사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금란가사와 장삼(중요민속자료 제29호)을 비롯해 평소에 모시고 다녔다는 원불(願佛), 선조임금이 하사하였다는 패도와 여러 종류의 사령문서들도 고서란히 남아 전시되고 있는데 1604년(선조37년)에 대사가 강화사절로 일본에 갈 때 그 호위문제와 일본에서 조선포로의 송환문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비명을 새긴 목판, 서산대사의 사적을 새긴 목판, 다라니경 목판, 금강경 아미타경 등이 표함되어 있다. 이 자료들은 임란 당시 승병의 활약과 그 이후 강화사절로서 역할을 고찰할 수있다는 학술적인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이 중 많은 수의 유물들이 국가지정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표충서원

영조 20년(1744년) 왕명으로 조정에서 임진왜란 때 구국 구민하신 3대 성사를 모시고 매년 춘추로 제향을 올리게 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고종 8년(1871년)에는 대원군에 의해 전국서원철폐령이 내렸으나 표충서원은 훼철을 면했다고 한다.
표충사가 불교와 유교가 통합된 한국사찰의 유연성을 보여 주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

 

 

 

 

 

 

사천왕문

표충사의 사당영역과 사원 영역을 구분하고 있는 문이다.

 

 

 

 

 

 

 

 

 

 

 

 

 

서래각

조선시대 1860년 철종 11년에 월암선사가 그의 스승 혜원법사의 유풍을 떨치고자 사부대중과 함께 만일 염불회를 결성하여 정진하던 곳으로 만일루라 하며, 아미타불의 48원을 상징하는 48칸과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평의 전각을 세우고 내부에 금동 석가여래좌상을 봉안하고 그 이듬해 아마타후불탱을 봉안하고 무량수각, 서래각이라 하였으며 편액의 글은 김정희 수제자인 위당 신관호의 글씨이다.

1926년 화마로 소실되었다가 1929년에 중건되었고, 1992년에 보수하였다.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42호이다.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보물 제467호)

표충사의 원래 이름은 죽림사(竹林寺)인데 신라 흥덕왕 4년(829)에 두번째로 크게 확장시켜 이름을 영정사(靈井寺)로 고쳤다고 전한다.
조선 헌종 5년(1839)에는 그때까지 밀양군 무안면에 있었던 표충사(表忠祠)를 영정사로 옮기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表忠寺)로 개칭하였고,
가람배치도 큰 이동이 있었던 것이니 이 탑도 그 때에 옮겨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표충사 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

 

 

 

신라의 태자가 먹고 병을 고쳤다고 전하는 영정양수

 

 

무더위에 시원스레 한잔을 먹으니 온몸에 상쾌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범종루

범종루 종각이라고 불리우는데 이층의 누각인 경우 범종루, 종루라고도 한다.

범종을 비롯해 법고, 목어, 운판의 불교의 법전사물을 설치되어 있다.

 

 

 

팔상전(경상남도문화재자료 141호)

 

1854년(철종 5년)에 당시 주지였던 환월선사(幻月禪師)가 창건하였으며, 1926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9년에 중창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 위치는 현재 종무소가 있는 자리이고 지금의 위치에는 표충서원이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부 승려들이 사찰 내에 유교식 서원의 존재가 불가할 뿐 아니라 대광전과 나란히 사당을 둔다는 것은 불경(不敬)하다는 지적이 있어 1971년에 자리를 맞바꾼 것이었다.

대광전과 마찬가지로 잘 다듬어진 장대석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며 내부에는 소조석가여래좌상만을 봉안되어 있다.

 

 

 

 

 

 

 

대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제 제131호)

대적광전(大寂光殿)의 준말로 표충사의 큰 법당이다. 앞면 5칸, 외3포 내3포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며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인 1929복원하였다. 앞면 돌계단 소맷돌의 조각, 잘 다듬은 주초석, 용마루 중앙과 추녀마루 장식이 돋보인다. 법당내부에는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깊이 신앙되어온 석가여래와 아미타여래, 약사여래의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동쪽 벽면에는 아미타 삼존도가 봉안되어있는데 가로 145mm 세로 226mm로 1885년(고종22)에 그렸다. 연화대좌에 선 삼존은 모두 단순한 원형 두광을 지니고 정면을 향하고 있다.
외벽에는 경전 속의 다양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나타냈는데, 이 중에 자동차가 있어 이채롭다고 할 수 있다.

 

 

 

 

대광전 내부

 

 

 

관음전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으로 세간의 음성을 관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관자재보살이라고도 하며 우보처 대세지보살과 함께 아미타여래의 좌보처이다.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본지를 받들어 대자대비와 16弘願(홍원)의 서원을 세워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중생들을 인도하는 보살이다.
현실 세계에서 “고통에 처한 중생이 그 이름을 맘에 간직하고 염불하면 그 음성을 듣고 중생에게 온갖 두려움이 없는 무외심를 베풀어서 시무외자(施無畏者)라고도 하며, 또 중생의 맘 속에 불안과 두려움을 제거하고 탐진치 삼독심을 여의게 하며, 아들이나 딸을 바라는 이에게는 그 願에 따라 그 자식을 얻게한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일반인에게 다가올 재앙을 물리쳐 주는 친숙한 보살로 33가지의 응신으로 세상에 나타시어 중생을 구제한다.


이곳 표충사 관음전에 모셔진 준제관음(准提觀音) 후불탱화는 1930년에 조성되었으며 천개의 손과 눈을 상징하는 42개의 팔을 가지고 있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좌우보처로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옹립해 있다.

 

명부전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명부시왕을 함께 모신 곳이다.
지옥에 계신 어머니를 구하고 지옥으로 떨어진 모든 자들이 구원될 때까지 지옥세계에 계시겠다는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이라 고도 하며, 또한 죽은 자의 삶을 평가하고 형벌을 정하며 새로 태어날 세계를 결정하는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함께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죽은 자가 심판받는다는 명부이니 영혼을 위로하는 재를 올리는 곳도 이곳 명부전이다.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전각이므로 쌍세전(雙世殿)이라고도 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 날로부터 49일 되는 날까지 7일째마다 차례로 7번 시왕 앞에 나아가 생전에 지은 죄업(罪業)의 경중과 선행· 악행을 심판 받는다고 한다.

49재(四十九齋)를 지내는 까닭도 여기서 연유하며, 명부전에서 재를 지내는 까닭은 지장보살의 자비를 바탕으로 시왕의 인도 아래 저승의 길을 밝혀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하고자 하는 뜻에서이다.


 

 

우화루

원래 중심범당인 대광전으로 들어서는 중문으로 최근까지 우화루 앞으로 진입로가 있었으나, 근래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진입로가 바뀌었다.

우화루는 야외참선 장소로 쓰인 곳이다.

 

 

 

우화루에서 바라보는 대광전과 팔상전

 

 

 

 

 

 

 

 

 

 

밀양 표충사

주소 :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31-2

전화번호 : 055-352-1150

홈페이지 : http://www.pyochungs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