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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여행/차이나타운] 자장면, 짜장면의 역사를 찾아 차이나타운의 공화춘, 짜장면박물관

들꽃(野花) 2015. 6. 4. 10:44

[인천여행/차이나타운] 자장면, 짜장면의 역사를 찾아 차이나타운의 공화춘, 짜장면박물관

 

인천여행길의 차이나타운에서 만난 공화춘, 짜장면박물관

따뜻한 봄날

인천의 대표 여행지인 차이나타운을 찾는다.

송내역에서 국철 1호선 인천행을 타고 인천역에 내리니 인천역 광장은 인산인해다. 대부분 학생들로 학교에서 단체로 차이나타운을 비롯한 인천의 근대화관련 문화재를 둘러보려고 나온 것 같다. 선생님과 학생, 그리고 이들을 안내할 문화해설사님들의 분주한 모습들이 광장내에 여러곳에서 볼 수 있다.

차이나타운에서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인천 차이나타운의 대표적인 식당인 공화춘이다.

공화춘이라 함은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아니라 짜장면박물관으로 새로이 개관한 공화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공화춘

인천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자유공원아래에 있는 차이나타운의 공화춘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르신들은 공화춘에서 짜장면 한그릇 쯤 드셨을 것 같다. 나그네가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이 1992년 동암역 근처 십정동에서 신접 살림을 하면서 였으니 공화춘이 폐업을 한 1983년에는 인천이 아니라 청주에서 대학생활을 할때다. 10년만 더 식당을 운영하였다면 공화춘에서 맛있는 짜장면 한그릇은 먹었을텐데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등록문화재 제246호 인천 선린동 공화춘(共和春)

문화재청이 2006년 4월 14일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였으며 2012년 4월 28일 짜장면을 테마로한 국내최초 '짜장면박물관'으로 개관하여 인천의 개항에 따라 중국에서 들어온 화교들의 삶과 짜장면에 대한 역사를 알 수 있는 곳이다.

 

하루 700만 그릇이 팔린다는 국민음식 짜장면의 최초 발원지인 옛 ‘공화춘’은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2010년 매입하여 짜장면을 주제로 한 국내 최초유일의 짜장면박물관으로 2012년 4월 28일 개관하였다.

 

 

짜장면이 초기 개발하여 판매된 곳은 공화춘이다.

공화춘이 처음 인천 차이나타운에 문을 열게 된 것은 1908년으로 중국 산동지역 출신인 우희광 선생이 22살의 젊은 나이에 ‘산동회관’(山東會館)이란 이름으로 첫 영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당시 산동회관은 단순한 ‘중국요리점’이 아니라 개항장이었던 인천항을 오가는 각국의 무역상들이 기거하고 음식을 먹는 중국의 객잔 성격의 공간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많은 화교들이 찾았다.

 

산동회관이 ‘공화춘(共和春)’으로 이름을 바꾼 계기는 1911년 1월 15일 청나라가 중화민국으로 바뀌면서, 아시아 최초로 공화국이 됐으니 매우 기쁜 일이며, ‘봄’이란 한 해의 시작이고, 청춘의 활기와 희망을 담고자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개칭을 한 것이다.

 

 

 

 

공화춘의 전경

 

1883년 인천이 개항하면서 청국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중국 음식점들이 생겨 났으며 이때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짜장면이 탄생하였다.

공화춘은 신해혁명 수 '공화국 원년의 봄'을 맞는다는 의미로 1912년에 문을 연 중국음식점으로 짜장면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원래 공화춘은 현재 건물의 동쪽 부분(동원)만을 사용하였으나, 사업이 번창함에 따라 1968년경 서쪽 건물(서원)을 매입 · 개보수하여 1883년 폐업때까지 사용하였다.

 

 

 

 

2층 구조물의 69평 규모인 ‘공화춘’은 중국 산동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지은 중정형(中庭型)의 중국식 건축물로, 외부는 벽돌로 마감하고 내부는 다양한 문양과 붉은색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공화춘’은 눈목자(目)형 건축물로 앞뒤에 일(一)자형 건축물이 있고 그 사이 공간에 4개의 건축물이 연결된 것이 주된 특징이며, 1층 기단부는 화강석을, 2층 창호는 목제창으로 만들었다.

 

 

 

외국 영토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통틀어 화교(華僑)라 일컫는데, 현지에서 태어나 현지 국적을 가진 2세, 3세는 화인(華人)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한국의 화교는 1882년 임오군란때 광동성수사제독 오장경의 군대를 따라 온 상인 40여 명이 한국에 체류하면서 교역을 한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데, 이해 중국과 수륙무역장정 체결 이후 이들의 활동고 활발해졌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현재의 인천 중구 선린동과 북성동 일대에 정착한 화교들이 그들만의 생활문화를 형성한 곳이다. 초기에는 청나라 거상들의 점포와 음식점 및 주택들이 들어서 있었고, 청나라 관청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청관'이라 하였다.

 

광복 후 선린동으로 동명을 개정하여 옛날과 같은 친선교류를 유지코자 하였으나, 우리정부가 화교의 경제권 확장을 제한하는 정책을 폄으로써 화교사회는 위축되었다.

1990년대 한중수교를 계기로 대중국 교류의 중심지로 성장 하였으며, 역사적 의의 깊은 관광명소로서 중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차이나타운으로 탈바꿈하였다.

 

 

 

 

 

공화춘 주식증서(1914년, 우레후 기탁유물)

 

 

 

공화춘 회계장부(1914~1949년)

 

 

 

인천영사관에서 발행한 화교여권(1934)

 

 

 

 

 

 

공화춘 식대 계산서(1961)

 

 

 

화교의 이발도구 삭도

 

화교들이 외국에 정착을 시작할 때면 세 자루의 칼(三把刀)이 유일한 그들의 생계 수단이었다.

음식점과 주방에서 사용하는 식칼인 육도(肉刀)와 채도(菜刀), 양복점에서 사용하는 가위인 전도(剪刀), 이발소에서 사용하는 면도칼인 체도(剃刀)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말은 화교들이 음식점, 양복점, 이발소에서 주로 종사하였음을 말해준다.

 

 

 

 

짜장면을 먹는 노동자, 쿨리(苦力)

 

 

 

1890년대를 전후하여 인천의 부둣가는 외국과의 무역이 한창이었다.

배에서 내리고 싣는 물건을 나르기 위해 고용된 수많은 짐꾼과 인력거꾼이 필요했는데 대부분 산둥 지방 출신의 노동자인 쿨리였다. 이들은 별다른 재료 없이 춘장에 수타면을 비벼, 즉석에서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고향의 메뉴인 짜장면을 먹었는데, 이들을 상대로 손수레 노점상이 하나 둘 생기면서 '짜장면'의 보급이 시작되었다.

 

 

 

 

 

 

 

 

공화춘 젓가락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서 젓가락은 필수적인 식사도구이다.

중국에서는 은나라 때부터 사용하였다고 하며 재료는 참대나무로부터 뼈, 옥, 은 등 다양하였다. 예전의 중국 통치자들은 금, 은 젓가락도 사용하였고, 특히 황제들은 독살을 염려해 은 젓가락을 많이 사용하였다.

결혼식 등 좋은 날에는 붉은색 젓가락을 사용한다.

 

한 · 중 · 일 젓가락의 특징을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금속재질이며 중국과 일본의 중간크기이다. 김치와 채소 같은 음식을 집기 편하도록 납작하게 생겼다.

중국의 재질은 주로 나무이며, 큰 상의 중아에 놓인 음식을 집기 편하게 가장자리가 뭉뚝하게 생겼다.

일본의 재질은 주로 나무이며, 작은 독상에 놓인 음식을 집기 용이한 짧은 형태이다. 국수와 해산물을 집기 편한 끝이 뾰족하게 생겼다.

 

 

 

 

 

 

공화춘 부채(1960년대)

 

 

 

 

 

짜장면이 서민들의 대표적인 외식 음식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물가 변동에 따라 짜장면 가격이 변화게 된다.

1960년대 초 쌀값이 3,010원(80kg 한 가마니)할 때 15원 하던 짜장면 값은 1970년대 중반 140원, 1980년대 350원이었다가 1990년에서 2000년대를 거치면서 급등하게 된다.

1990년대 초기 1,300원이었던 짜장면 가격은 2000년대 경제 위기를 전후해 짜장면은 3,000원(쌀 한가마니 20만원)까지 치솟게 된다. 현재 짜장면 한 그릇은 4,000원 ~ 4,500원으로 50년 동안 450배가 올랐다.

 

 

 

 

 

추억의 짜장면 그릇

짜장면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살이 두툼하게 붙은 수더분한 사기그릇에 담아야 제 맛이 난다.

그 모양새와 어울리게 듬뿍 담아낸 국수와 짜장에서 만든이의 넉넉한 마음씨를 읽기도 한다.

 

 

 

혼 · 분식 장려운동

1964년부터 1977년까지 10여 년 동안 진행된 혼분식 장려운동은 국민 식생활 개선을 위한 계몽운동으로 주곡인 쌀을 자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 곡물이 쌓여가자 정부에서 내려진 조치이다.

보리, 콩, 조 등 잡곡을 섞은 밥이 혼식이고, 밀가루 음식이 분식이다.

 

 

 

지금처럼 외식이 흔하지 않던 시절, 졸업 때면 흔히 보는 풍경으로 중국음식점에 가면 부모를 따라 외식하러 나온 졸업생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3년 동안 학교다니느라고  고생했다며 모처럼 부모님들이 짜장면 한그릇 내는 일이 졸업식이었던 거다.

 

 

 

 

 

철가방이야기

 

 

 

광복 후 짜장면, 짬뽕으로 대변되는 중국 음식은 신속배달이라는 구호 아래 급속히 대중화되었는데, 이에 따라 음식 배달을 위한 '철가방'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나무로 된 가방을 만들었지만 너무 무거운 데다가 넘친 음식들이 나무에 스며들어 생기는 위생문제 때문에 오래 사용되지 못하였다.

그뒤 플라스틱 철가방도 만들었으나 금형 비용이 비싸 일반화도지 못하다가, 알루미늄 판과 함석판 같은 싼 재료가 등장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은 지난 반세기 한국인의 일상을 대표할 수 있는 생활속 디자인 가운데 하나로 중국음식점의 '철가방'을 선정했다. 모나미 153볼펜, 신라면, 칠성사이다, 포니자동차, 시발택시 등과 함께 큰 영예를 누리게 된 것이다.

 

 

 

김씨 표류기(2007년)

표류하던 김씨, 짜파게티 스프 봉지를 발견하고 그 후로부터 자장면이 머리속을 장악한다.

 

 

 

자장면 ? 짜장면 ?

'자장면'이 맞나? '짜장면'이 맞나?

누구나 한번쯤 궁금하게 여겨봤던 철자이다.

국어사전은 이를 '자장면'으로 표기해 왔는데, 중국식 발음은 '짜지앙미옌'이다. '짜지앙미옌'은 '짜장미옌'에서 '짜장면'으로 발음하기 좋게 자연스레 변천했을 터이나 , 언어 순화 차원에서 된소리 사용을 자제한다며 현실음과 다른 '자장면'을 표준말로 정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짜장면'을 즐겨 써 왔고, 그 발음이 중국 현지의 발음과 비슷할 뿐만아니라, 맛이 다소 '짜다'는 이미지까지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최근 국립언어연구원이 표기법사 '자장면'도 맞고, '짜장면'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대중은 그 와는 상관없이 이미 수 십년 전부터 '짜장면'이란 낱말을 통해 '짜장면'의 맛과 추억을 간직해 왔던 것이다.

 

 

 

블랙데이

매월 14일은 대한민국 신세대들이 만들어 낸 비공식적 기념일일로 아직 연인을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검은 색 계통의 옷을 입거나 짜장면, 블랙커피 같은 검은색 계통의 음식을 먹고, 마시며 이날을 즐긴다고 한다.

 

 

 

 

 

 

짜장면이 외식 문화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사랑을 받기 시작한 계기는 '사자표 춘장'의 등장과 전후 미국의 밀가루 원조이다. 1948년 '영화장유'라는 식품회사를 차린 산동 출신 화교 왕송산은 달콤한 맛을 선호하는 한국인을 위해 중국 춘장에 설탕을 가열하여 만든 끈끈한 갈색의 물질인 캐러멜을 하였다.

여기에 한국전쟁 후 가장 많이 지원된 것이 밀이었는데, 때마침 쏟아져 나온 값싼 밀가루와 이 소스의 만남으로 '짜장면'은 더욱 대중화되었다.

 

 

대한제분 곰표 밀가루의 역사

 

 

 

 

 

 

수타주방

 

 

 

칼판 주방

 

 

 

 

 

공화춘의 옛 간판

 

 

 

관람안내

 - 연중 무휴 09:00 ~ 18:00

 - 관람료 개인 1,000원

 - 통합관람료  개인 1,700원(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인천개항박물관, 짜장면박물관)

 

 

찾아가는 곳

 

공화춘, 짜장면박물관

주소 :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1가 38-1(차이나타운로 56-14)

전화번호 : 032 - 773 - 9812

홈페이지 : http://www.icjgss.or.kr/jajangmy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