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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여행] 파주 이이 유적-사적 제525호,율곡,이이,신사임당,자운서원,오죽헌,파주문화재답사

들꽃(野花) 2017. 8. 11. 05:30

[파주여행] 파주 이이 유적-사적 제525호,율곡,이이,신사임당,자운서원,오죽헌,파주문화재답사

 

 

파주 이이 유적

사적 제525호

 

이곳은 율곡 이이 관련 유적을 대표하는 것으로

율곡 이이를 배향한 자운서원,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묘소를 포함한 가족묘역이 한 공간에 모여있다.

 

율곡 이이(1536~1584)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 파주 율곡리에서 성장한 이이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일 뿐만아니라,

'십만양병설', 대동법의 실시, 사창의 설치 등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대표적인 정치 개혁가였다.

저서로 「동호문답 」, 「성학집요」, 「격몽요결」 등이 있으며

대사헌을 비롯하여 대제학, 호조, 병조, 이조판서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이는 유학에 있어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이황과 서경덕의 설을 절충하여 일원론적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였고,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세상을 떠난 후 이곳 자운산 선산에 묻혔는데,

묘역은 부인 곡산노씨 묘와 위아래로 조성되어 있다.

 

 

 

율곡선생 유적지에는

자운서원과 묘정비, 묘역, 이이선생 신도비와 기념관이 있어 여유롭게 둘러봄이 좋습니다.

 

 

 

율곡선생 유적지

 

 

신삼문

신문을 셋으로 나누어 만든 것은

신의 출입과 사람의 출입을 구분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삼문 중 중앙은 신문(神門)이고 양쪽의 문은 인문(人門)이라 합니다.

신문은 항상 닫아두는 것이 상례이고,

인문은 열어 두어 일반 참배객의 내왕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신문은 춘추 제향이나 삭망 때 열어서 헌관만 출입하고

일반 제관은 동문으로 들어가서 서문으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동문으로 들어가야죠.

동문 즉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어~~

이 두분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얼마전에 서울 종로의 사직공원에서 봤었는데

다니던 사무실이 근처라 점심시간마다 사직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항상 봤었는데

언제 이곳으로 옮겼지

 

 

 

 

2014년 5월 9일

사직공원의 사진입니다.

점심시간마다 이렇게 두분을 뵙다가

6월 말일자로 ~~~어쩌구 저쩌구 ~~~ 해서

지금껏 사직공원을 못 갔는데

여기서 뵙게 되네요.

 

 

 

 

 

율곡기념관 앞에서 바라본 자운서원입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갑니다.

 

 

어머니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선생이 문 좌우에 나란히 계시네요.

 

뭔가 다른점이 있네요.

조금전에 본 두분의 조각상은 어머니가 오른쪽이었는데 여기서는 왼쪽입니다.

 

 

간단한 족자를 판매도 하고 있습니다.

 

 

 

 

 

 

율곡 이이 선생이 쓴 글이라 합니다.

 

 

 

 

 

 

 

 

율곡의 어린시절

 

율곡은 어린 시절부터 비범하여 3세에 이미 말과 글을 배우기 시작하엿다.

8살 때는 고향 파주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가 가을 풍경의 정취를 아름다운 시로

읊었으며, 10살 때는 강릉 경포대를 들러 장문의 <경포대부>를 지었다.

 

 

 

삶과 죽음을 깨닫다.

 

율곡이 16세가 되던 해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났다.

율곡은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며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모신것으로 유명하다.

이 무렵 그는 '사람은 왜 태어나며 왜 죽지 않으면 안되는가?'

에 대해 자문하며 3년을 보냈다.

 

 

 

 

금강산 입산

 

율곡은 19살 때 금강상 마하연으로 들어가 '의암'이라는 법명으로 불교수행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불교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진리를 찾지 못한 채 1년만에 금강산을 나오게 된다.

오히려 유교에 성인이 되는 길이 있고,

남을 위해 일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자경문(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을 지어 뜻을 세우고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아홉번 장원급제하다(구도장원공)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고,

21세에는 한성시에 급제하였으며,

23세에는 <천도책>으로 장원급제하였다.

1564년 이이는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과거에 총 9번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거리를 지나갈 때면 아이들까지도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 지나간다고 우러러 보았다.

 

 

 

상소를 올리다(만언봉사)

 

벼슬길에 오른 그는 정치 사회에 참여하면서

가슴에 간직하고 있던 이상을 실현하기 시작하였다.

수 많은 상소를 올려 임금에게 간언하였는데

<만언봉사>가 대표적이다.

<만언봉사>의 경우 상소를 읽은 선조의 답변에

"상소의 사연을 살펴보니 임금과 백성을 요순시대처럼 만들겠다는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옛 사람도 여기에 더할 수 없겠도다. 이런 신하가 있는데 어찌 나라가

다스러지지 않음을 걱정하겠느냐"라고 할 정도였다.

 

 

 

 

 

고향으로 돌아가다.

 

42세 때 이이는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에서 은병정사를 짓고 제자를 키우는 일에 힘을 쏟았다.

은병정사는 조선 성리학의 이상을 향촌사회에 실현하려한 이이의 대동사회에 대한

꿈이 담겨진 곳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정의 부름을 받은 이이는

이조, 형조, 병조판서로 관직을 두로 거쳤고,

사망한 해 전인 1583년 2월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시무(時務)6조>를 올려 국방을 튼튼히 하고자 하는 그의 충심을 드러내었다.

 

 

 

 

 

 

 

 

 

율곡 이이의 자필 한시

 

 

 

소현서원(은병정사)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에 있는 서원이다.

이곳은 조선 명종·선조 때의 대학자인 율곡선생이 43세에 은거하여

주자를 추모하는 한편 학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세운 곳이다.

1610년(광해군 2)에 소현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손되었다가 1950년대 이후에 복원되었다.

현재 북한의 보물급 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재실

 

 

 

 

 

 

 

여견문(如見門)

 

 

 

 

 

 

이이의 맏아들 묘

 

 

 

이이의 부모 묘
(이원수와 신사임당)

 

 

 

 

 

이이와 부인 곡산노씨의 묘

 

 

이이의 묘소는

부모의 묘소보다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자식이 현달하거나 입신양명했을 경우 부모보다 높은 자리에 묘를 쓰는 당시의 풍습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합니다.

또한

이이의 부인 곡산노씨의 묘는

이이의 묘보다 조금 위쪽에 전후합장묘의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자운서원

 

조선 광해군 7년(1615)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들에 의해 창건된 서원이다.

효종 원년(1650)에 '자운'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5년(186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70년 문성사(사당)와

내삼문을 복원하였고, 1997년 강당과 동·서재를 복원하였다.

 

 

 

 

 

 

 

 

강인당

 

 

 

문성사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 건물로

중앙에 율곡 이이 선생을 오른쪽에 사계 김장생 선생, 왼쪽에 현석 박세체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자운서원 묘정비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자운서원의 내력을 적은 비로

숙종 9년(1683)에 세워졌다.

비는 서원의 내삼문 밖 우측에 있는데 장방형의 대석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개석을 올렸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김수증이 예서체로 썼으며

머리글은 김수항이 썼다.

 

 

 

 

 

 

 

율곡이이 신도비

 

신도비는 선생이 돌아가신지 47년이 지난 인조 9년(1631) 4월에 건립된 것으로

이항복이 글을 짓고, 신익성이 글씨를 썼으며, 전액은 김상용이 썼다.

비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앞 뒷면에 걸쳐 각자되어 있는데

규모는 높이 223cm, 너비 109cm, 두께 39cm이다.

 

 

 

찾아가는 곳

파주 이이 유적 - 사적 제525호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