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의 길,맛,멋따라♣/절집 여행

호국과 남도예술의 도량인 두륜산의 대흥사

들꽃(野花) 2009. 10. 29. 07:35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흐트러지지 않을 땅(萬年不毁之基)”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토록 한 도량이기도 하다. 이후 대흥사는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즉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중기 이후 수많은 선승(禪僧)과 교학승(敎學僧)을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대흥사는 대표적인 호국도량의 위상도 간직하고 있다. 현재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表忠祠)는 서산대사의 구국정신을 기려 국가에서 건립한 호국도량의 한 표상인 것이다.  그리고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넓은 산간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의(표충사,대광명전,박물관) 3구역으로 나뉘어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에는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남원 뒤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사명대사의 사당인 표충사 구역과 대광명전 구역이 있다.

 

  그러나 현재 관람객이 볼 수 있는 곳은 북원과 별원의 표충사, 박물관 등이 있다.

 

 

 

 주차장에서 대흥사로 들어가는 길

 

사찰 안에 있는 여관으로 유명한 유선관의 모습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보이는 부도밭으로 이곳에는 서산대사의 부도도 있다.

 

 

 

 

 

 

 

 

 

 

 

 

  

 

북원의 대웅보전으로 시도유형문화재 제296호로 지정되었으며

  이 건물은 조선 현종 8년(1667년) 심수대사가 중건하였다고 하나 그 후에도 중수가 있었던 듯하다. 전면에 장대석으로 높이 쌓은 단 위에 기단을 마련하고, 전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을 지었는데, 귀 기둥을 제외한 전면 기둥 상부에는 용두를 새기고 쇠서에도 연꽃을 새겨 조선후기적 특징을 보였다. 전면에는 각 칸마다 빗살무늬의 이분합문을 달았으며, 가운데 현판은 조선후기의 명필인 원교 이광사선생의 글씨이다. 건물 안에는 목조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윤장대를 돌리고 있는 저 소년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아니면 그저 돌리면 돈다는 것을 알고 그저 장난삼아 그럴까. 그 마음은 저 소년만이 알고 있지 않을까. 모쪼록 소원성취 하길 바란다. 

 

응진전

 

 

보물 제320호로 지정된 대흥사응진전전삼층석탑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자장(慈藏)이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이라 한다.

 

  탑의 형태는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신라의 일반형 석탑이다. 아래·위층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처마가 두껍고 윗면은 경쾌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상륜부에는 머리장식으로 몸돌로 보일만큼 큰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 등이 올려져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 높이가 크게 줄었으나, 넓이는 거의 줄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 기둥수가 하나로 줄어들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4단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작품으로 추측된다. 대둔산 정상부근에 세워진 대흥사북미륵암삼층석탑(국보 제308)과 함께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이 서남단 지방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연리근(連理根)

(천년의 인연,만남,약속)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서로 만나 합쳐지는 현상을 [연리連理]라고 합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햇빛을 향해, 바람을 따라 서로 부대끼고 겹쳐져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連理根), 줄기가 겹치면 연리목(連理木), 가지가 하나되면 연리지(連理枝)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두 몸이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각각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연인의 사랑에 비유되어 일명 '사랑나무'로도 불립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도 연리나무에 관한 기록이 전하는데, 우리 조상들은 연리나무가 나타나면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길조(吉兆)로 여겼습니다.

대흥사 연리근은 천년된 느티나무로 그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왼쪽은 음의 형태이며 오른쪽은 양의 형태로 언듯 남녀가 천년동안 사랑을 하고 있는 듯 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연리 나무 앞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 하면 사랑의 소원이 성취되고, 사람들의 마음속의 바라는(사랑, 소원, 희망, 승진, 건강, 화합, 우정, 합격, 성공 등)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오늘 등불 하나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 속 깊은 사랑변치 않도록, 꺼지지 않는 등불 하나
참 고운 등불 하나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대흥사의 남원쪽인데 관람객이 들어 갈 수 없다 합니다.

 

 

 

유물박물관

 

표충사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1520∼1604)를 모시는 사당으로 현재 그의 제자인 유정과 처영의 영정도 함께 모시고 있다.

 

서산대사는 9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서울에 올라와 절에 기거하며 글과 무예를 익혔다. 그러던 중 영관대사의 설법을 듣고 불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훗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명종 4년(1549)에는 승과에 급제하고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유명한 산을 돌아다니며 후학들을 만나 친절히 지도해 주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늙은 몸을 이끌고 전국의 승려들에게 격문을 돌려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서도록 하였다. 묘향산에서 1,500여명, 그의 제자인 유정은 금강산에서 700여명, 처영은 지리산에서 1,200여명의 승병을 모집하여 순안, 평양 등지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전쟁 이후 그는 승려로서 최고의 존칭과 정2품 당상관 작위를 받았으며 묘향산에서 선조 37년(1604) 입적하였다. 이 건물은 조선 정조 12년(1788)에 세웠으며 앞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조사전

 

표충비각

 

 

 

꽃무릇(석산)이 활짝 피어 있습니다.

연리근의 반대라 할까요. 꽃과 잎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사랑이 이루어 지길 바랍니다.

 

 

초의선사의 상

 

 

사진 찍으면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출입금지지역을 찍는 것입니다.

담너머로 찍어야하는게 영 마음에 내키지 않습니다. 

 

 

 

 

 

 

 

 

 

 

 

 

님이시여!!!

지나온 뒤안길이 업보인 듯 겨울 날은

그리운 생각들을 연꽃으로 피워놓고

가냘픈 숨결을 모아 불러보는 님의 노래

 

번뇌는 백도 여덟 차라리 염주로 헤면

노을 겹겹 밀려오는 이 아픔의 둘레밖엔

결 고운 목탁소리가 메아리로 돌아오고

 

갈피 그 가슴으로 젖어오는 사랑을 두고

손 모아 우러르면 눈이 환한 미소인데

이 밤 사 부처님 앞에 합장하는 마음인가

  - 현월 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