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어디로 갈까?
비도 내린다는데 멀리 가자니 그렇고 가까운 강화도로 가자.
아!
고려왕릉중 하나인 곤릉을 찾아보자.
네비게이션을 가지고 있지 않고(지금도 물론 없다) 인터넷의 지도서비스도 없을 때 그곳을 두번이나 찾아갔으나 헛탕치고 온 곳이니 이번에 또 가 보자.
집사람도 요즘 블로그를 운영하다보니 여행 주제가 필요하니 더욱 잘 되었다.
강화도는 인천에서 그리 멀지 않으나 그래도 한시간은 족히 걸린다.
내가 강화도에 몇번을 왔는지 알 수가 없다. 즉, 너무 많이 왔다는 것이 문제다.
처음 발길이 머문 곳이 초지진이다.
초지진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면
사적(제225호)
초지진의 당초 위치는 안산(安山)의 초지량(草芝梁)에 수군의 만호영(萬戶營)이 있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1666년(효종(孝宗)7)에 초지량영을 이곳 강화로 옮기고, 이후 첨사(僉使)의 진(鎭)으로 승격되었다.
진에는 군선(軍船) 3척을 비롯하여 첨사 이하의 군관 11인과 사병98인·돈군(墩軍)18인·목자(牧子) 210명 등이 배속되고, 초지돈(草芝墩)·장자평돈(長子坪墩)·섬암돈(蟾巖墩)의 세군데 돈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각각의 돈대에는 3개씩의 포좌(砲座)가 마련되어 있었고, 여기에 대완구(大碗口)를 비롯한 화약병기와 각종 무구류가 있어 강화 해협을 지키고 있었다.
1871년(고종(高宗)8) 4월 23일 미국의 로저스 제독(提督)이 지휘하는 극동 함대가 콜로라도호(號)를 비롯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는 군사적 행동을 한 이른바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다. 모노카시호(號)와 팔로스호(號)등의 함포지원 아래 킴벌레이 중령(中領)이 미국 해병 450명을 이끌고 20척의 작은 배로 상륙전을 감행하자, 이곳 초지진에서는 수비대가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배하여 결국 미군에 점령당하였다. 이때 진내에 있던 군기고(軍器庫)·화약고·진사(鎭舍) 등 군사 시설물은 미군에 의하여 모조리 파괴되었으며, 포대에 남아 있던 40여문의 대포 역시 파괴되거나, 그들에 의하여 강화 해협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양요가 끝나자 다시 원상대로 복구되었다.
1875년에는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기 위하여 파견한 운양호(雲揚號)에 의하여 또 한번 곤욕을 치렀다. 같은 해 8월 21일 운요호가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난芝島) 부근에 정박하고, 함장 이노우에( 정상(井上))가 단정(短艇)을 내려 담수(淡水)를 찾는다는 구실로 초비진 포대에 접근하여 왔다. 이에 미군의 침략으로 쓰라린 경험을 하였던 초지진 수비군이 일본 함정을 향하여 포격을 개시하자 운요호는 110mm와 40mm 함포로 포격을 해와 초지진 포대는 일시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때 초지진에는 사정거리 70m 정도의 2인치 정도의 대완구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 뒤 초지진은 폐진(廢鎭)되었고, 시설은 모두 허물어져 돈대(墩臺)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m되는 타원형으로 이 돈대에는 3개소의 포좌(包座)가 있고 총좌(銃座)가 100여개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대포 1문이 포각(砲閣)속에 전시(展示)되어 있다.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성벽, 이밖에도 소나무에도 당시의 포탄자국이 남아있어 전쟁의 흔적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들린곳이 나를 두번이나 헛고생을 하게 만든 곤릉이다.
역시 도로의 이정표는 곤릉이 도로가에서 700m들어가라고 되어있다.
이것을 믿고 그냥 앞으로만 들어갔으니 허탕칠 수 밖에 2차선도로에서 방향을 잡자마자 얼마가지 않아 오른쪽으로 난 길에 젊은 남녀가 내려오는게 보인다.
그쪽을 자세히 보니 곤릉이란 낡아빠진 안내판이 보인다.
왜 저것을 보지 못했을까.
젊은 남녀가 내려온 길로 차를 운전하니 안내가 보인다.
와우! 찾았다.
차를 길가에 주차시키고 산길로 들어서자마자 밭에서 한가로이 토종닭들이 먹이를 먹고 있다.
이정표가 눈에 잘 들어온다.
곤릉(사적 제371호)
곤릉은 고려 강종(재위 1211∼1213)의 부인인 원덕태후 유씨의 무덤으로
원덕태후는 고종의 어머니로 강종 1년(1212)에 왕비가 되고 연덕궁주라 하였다. 뒷날 원덕태후는 추대되고 1253년에 정강의 시호가 더해졌는데,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석물은 없어졌고 봉분과 무덤을 둘러싼 담도 무너졌던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이곳을 나와 가릉으로 향한다.
가릉은 지금처럼 정리되기 전에 한번 들른 적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한데 그때는 마을 안길로 들어갔는데 길이 막혀있다.
주차장! 그래 조금 전에 지나친 주차장이 생각났다.
그리로 가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마을 안쪽으로 걸어서 찾아갔다.
저기 능이 보인다.
가릉은
고려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으로,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지금의 자리에는 고종 31년(1244)경 사망한 뒤 모신 것으로 짐작한다. 고려 원종 3년(1262)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부서져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가릉(사적 제370호)
가릉에 오면 바로 뒤에 있는 능내리석실고분을 들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퀴즈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숨은 그림 찾기
저기 어딘가에 있는 산짐승을 찾아보세요.
뭘까요?
정답은
고라니입니다.
잔디가 끝나는 지점을 보시면 약간 회색 빛 나는것이 보이나요. (중앙 지점)
고라니를 사진으로 찍었는데 잘 보이지 않길래 퀴즈로 처리...
강화능내리석실분은 시도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석실분은 고려시대 지배계층의 무덤로 생각되는 곳으로 무덤의 크기는 남북 방향 길이가 270㎝ 정도, 깊이가 195㎝의 규모로 내부는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쌓았다. 무덤 앞쪽에는 사각형의 석주가 있는데 3면에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고려고종홍릉을 찾았습니다.
이곳은 고려산 아래에 있으며 강화읍내에서 적석사로 넘어가기 직전 청소년수련관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홍릉은 고려 23대 고종(1192∼1259)의 무덤이다.
이 당시는 정치적으로 최씨 집권시기였으며 밖으로는 거란·몽골의 침입 등으로 고통받았던 시기이다. 고종 18년(1231)부터 여러 차례에 거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국토는 초토화되고, 인명과 문화 유산의 손실 또한 매우 컸다. 고종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대장경을 만드는 등 문화상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이 현재 합천 해인사에 남아있는 『고려대장경』이다.
원래의 홍릉은 높게 쌓은 3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제일 아래에 정자각, 2단에는 사람형상을 한 조각, 가장 높은 곳에는 왕릉이 배치된 형식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무덤 주위에는 난간으로 두른 돌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무덤의 4모서리에는 짐승을 조각한 돌이 1개씩 배치되어 있었으나 없어졌고, 현재는 사람 모양의 돌조각 2구가 남아있다. 최근에 난간을 보수하고, 봉토 아랫부분에 능을 보호하는 돌을 설치하였다.
(사적 제224호)
이밖에도
사적 제369호인 석릉도 있다.
석릉은 고려 희종(재위 1204∼1237)의 무덤이다.
희종은 신종의 첫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선태후 김씨이며, 부인은 성평왕후 왕씨이다. 1204년 왕위에 올랐고,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희종 7년(1211)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 교동으로 갔다. 고종 24년(1237) 57세의 나이로 죽자 낙진궁으로 옮겼으며, 10월에 덕정산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석릉이라 하였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무덤을 쌓았는데, 그 뒤 석물도 부서지고 무너진 무덤을 1974년 손질하여 고쳤다. 석릉 주변에는 최근에 고려시대 귀족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돌방무덤(석실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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