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으니 바로 논산훈련소이다.
군대를 대학을 졸업하고 1986년 무더운 여름날(8월 11일) 이곳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군 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논산훈련소 30연대, 지금은 중대나 소대, 기억이 안난다.
다만 30연대라는 것, 그리고 무더운 여름날 훈련을 하다보니 따뜻한 물이 갈증해소에 최고라는 것, 안질이 번져 가스실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
방독면을 사용하는 것을 조교가 시범만 보였는데 이게 시작인지 군생활하면서 유격을, 또한 가스실을 한번도 들어가지 않고 제대하였으니 행운이었나보다.
논산의 기억은 이게 다였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찾았으니 세월이 많이 흘렀나 보다.
이번에는 논산의 문화재를 찾아, 가족과 함께...
논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은진미륵이라고 한다.
그래 거기서 부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의 계획을 말이다.
강경을 들러 미내다리, 팔괘정, 죽림서원, 일미정, 원목다리를 거쳐 논산 시내에서 아침겸 점심을 먹고 찾았다.
관촉사는 충남 은진면 관촉리에 사찰로 은진미륵 있는 사찰로 알려져 있다.
절은 반야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입구에서 부터 일주문, 천왕문을 거쳐 절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누각 밑으로 해서 올라가면 제일 먼저 맞는 것은 대웅전이며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역시 은진미륵이다. 은진미륵은 대웅전의 우측에 있는데 삼층석탑, 석등과 함께 있다.
관촉사를 대표하는 것은 흔히 은진미륵이라 불리는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이다.
이 불상을 조성하게 된 경위는 「관촉사사적비명」에는 그 과정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내용을 보면, 고려시대인 광종 19년(968)에 사제촌(沙梯村)에 사는 한 여인이 고사리를 캐다가 반약산(盤藥山) 서쪽 골짜기에서 나는 동자의 목소리를 들게 되었다. 소리 나는 쪽으로 나가보니 커다란 바위가 땅속에서 솟아났고 이것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백관이 모여 회의한 결과 불상을 조성하라는 조짐으로 판단하고 상의원(尙醫院)으로 하여금 각지에 불상을 조성하는 장인을 구하도록 하였다. 이에 승려 혜명(慧明)이 추천을 받아 백여 명의 장인과 함께 불상 조성을 시작하였다. 공사는 광종 21년(970)부터 목종 9년(1006)에 이르는 37년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그런데 존상을 완성하고 도량으로 봉안하는데 천여 명이 힘을 합해 운반하였으나 이를 바로 세우지 못해 근심하고 있었다. 이때 혜명스님은 어린 아이가 흙을 가지고 불상을 만드는 놀이를 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즉, 평지에 먼저 본체를 세우기 위해 모래를 쌓고, 그 가운데 세우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아 본대로 불상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이는 문수(文殊) 보현(普賢)이 동자의 모습으로 화하여 가르침을 준 것이라 전한다.
이 사적기에 따르면 미륵보살입상의 조성 년대는 970~1006년이지만, 이마의 백호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묵기(黙記)에는 광종 19년(968)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사적기는 조선후기에 작성된 반면 묵기는 불상조성과 함께 쓰였을 것이므로 미륵보살입상은 968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조금 걷다보면 우측에 시선이 가게 된다.
연밭이다.
연꽃이 피는 계절에 온다면 백련인지, 홍련인지 알 수 있을 텐데,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일주문이다.
벌써 구경을 마쳤는지 많은 사람들이 몰려 나오고 있다.
천왕문
천왕문을 지나니 돌로 만든 계단이 나온다.
누가 저 바위에 새겼을까.
나무아미타불
약수가 보이는데 물이 말랐는지 사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계단 끝 쯤에 우리의 앞을 막는 누각이 보인다.
누각 아래로 연결된 계단이 꽤나 높다. 힘이 들것 같다.
대웅보전
사람들은 곧바로 오른쪽에 있는 은진미륵으로 향한다.
은진미륵과 함께 서 있는 삼층석탑, 배례석, 석등이 우리를 맞는다.
시도유형문화재 제53호 관촉사배례석
관촉사 석등에서 약 10m 동쪽으로 떨어진 화단안에 있는 것으로, 절을 찾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로 사용된다.
직사각형의 받침돌 형태로, 옆면에는 안상(眼象)을 옅게 새긴 후 그 안에 고사리 무늬 같은 버섯구름 모양을 새겨 넣었다. 윗면에는 가운데 커다란 연꽃을 중심으로 좌우에 그보다 약간 작은 연꽃 두 송이와 2개의 연줄기를 조각하였다. 조각이 정교하고 장중한 맛이 풍기며,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우수한 작품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232호 관촉사 석등
관촉사 앞뜰의 은진미륵 앞에 놓여있는 4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식으로,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 새겨진 굵직한 연꽃무늬가 두터움을 드러내고 있다. 가운데받침은 각이없는 굵고 둥그런 기둥으로 세웠는데, 위아래 양끝에는 두줄기의 띠를 두르고, 중간에는 세줄기의 띠를 둘렀다. 특히 중간의 세 줄기 중에서 가장 굵게 두른 가운데 띠에는 8송이의 꽃을 조각하여 곱게 장식하였다. 2층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1층에 4개의 기둥을 세워 지붕돌을 받치도록 하였는데, 기둥이 빈약한 반면 창은 터무니없이 널찍하다. 각 층의 지붕들은 처마가 가볍게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네 귀퉁이에는 큼직한 꽃 조각이 서 있어 부드러운 조화를 이룬다. 꼭대기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큼직한 꽃봉오리모양의 장식을 두었는데, 조각이 두터워서 인지 무거워 보인다.
전체적으로 뒤에 서 있는 석불 못지않게 힘차 보이나, 화사석의 네 기둥이 가늘어 균형이 깨지고, 받침의 가운데기둥이 너무 굵고 각이 없어 그 효과가 줄어든 감이 있다. 뒤의 석불 즉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과 함께 고려 광종 19년(968)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남한에서는 화엄사각황전 앞석등(국보 제12호) 다음으로 거대한 규모를 보여준다.
보물 제218호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으로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며 높이가 18m에 이르는데, 당시 충청도에서 유행하던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관(冠)을 쓰고 있고, 그 위에는 이중의 네모난 갓 모양으로 보개(寶蓋)가 표현되었는데, 모서리에 청동으로 만든 풍경이 달려 있다. 체구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이며, 옆으로 긴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옷주름선이 간략화되어 단조롭다. 불상의 몸이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느낌을 주며, 대형화된 신체에 비해 조각수법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광종 19년(968)에 만든 관음보살상이라 전해지는데, 연대 고찰을 위해 참고할 만하다. 이 보살상은 경기·충청일대에서 특징적으로 조성되었던 토착성이 강한 불상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어 크게 주목된다.
문화재자료 제79호 관촉사 석문
사찰내로 들어가려면 누각 아래로 해서 바로 대웅보전으로 가거나 누각 오른쪽의 석문을 통과하여 들어 갈 수 있다.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문으로 일명 ‘해탈문’이라고도 부른다.
문은 네모난 돌기둥을 양쪽에 세운 후, 양 기둥 뒤쪽으로 길쭉한 돌을 5개씩 쌓아 옆면을 이루게 하였다. 기둥 위로는 네모지고 넓적한 돌을 얹어 놓아 전체적으로 4각의 모습을 하고 있다. 관촉사가 건립된 후 참배객이 몰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 동·서·남·북 4곳에 이러한 문을 두었는데, 그중 동쪽에 세운 이 문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석문을 세운 시기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관촉사가 건립되었던 고려시대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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