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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후삼국 통일의 호국사찰 논산의 개태사

들꽃(野花) 2010. 4. 18. 00:30

개태사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천호산의 서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19년(936년) 후백제를 정복하고 신검왕의 항복을 받으으로서 후삼국을 통일한 기념으로 왕명을 내려 창건한 호국사찰이다. 

 

  태조 왕건은 친히 발원문을 지어 부처님께 올리고 제불제천(諸佛諸天)의 가호로 고려의 만세태평과 국운과 번창과 민생의 안정을 염원했다. 천호(天護)라는 산명(山名)과 개태(開泰)라는 사명(寺名)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개태사에는 태조의 진전(眞殿)을 지어 영정과 유품 등을 모셨으며, 국가에 큰 변고가 있을 때마다 충신들이 모여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호국도량이 되었다. 호국사찰로서 고려시대에는 크게 번영하였으나 고려말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약탈과 방화가 계속되다 폐사가 되었다.

 

1930년에 들어와 석불입상을 복원하면서 중건이 시작되어 용화대보궁을 비롯해 정법궁, 우주정, 요사 및 5층석탑을 갖춘 현재의 모습이 이루어졌다.

 

개태사에서 조금 위쪽으로 가면 개태사지를 만날 수 있다. 지금은 아직 복원이 되지 않아 황량하지만 조만간 발굴이 이루어질것 같다.

 

 

개태사지 석조로 큰 돌을 넓게 파서 물을 받아 사용하는 일종의 물확이다. 이것은 개태사지에 있는 것으로 윗부분만 노출된 채로 땅속에 묻혀있다.

 

 

잠깐

개태사에 전해내려오는 먹정바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옛날 이 곳에 우택 이라는 도령이 살았다. 그는 사냥을 즐겼는데 하루는 머슴 한 명을 데리고 사냥을 떠났다. 숲이 우거지고 산새 소리도 여기 저기 지저귀는 자연 속에서 이리 저리 돌아 다니던 중이었다.


  "아~악!"
산중에 어느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우택은 머슴과 쏜살같이 소리 나는 곳으로 갔다. 거기엔 옷이 너덜해진 한 여인이 떨고 있었고 그녀의 앞에는 집 채 만한 호랑이가 으르릉거리고 있었다. 우택은 몸을 날렸다. 오로지 여인을 구하기 위한 일념 이었다.


호랑이와 사람이 엉켜 뒹굴었다. 사내와 호랑이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가 흥건이 묻었다. 잠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중에 우택의 머슴이 칼을 꺼내더니 호랑이에게 돌진 하였다. 형세는 금새 호랑이와 머슴이 뒤엉키는 꼴이 되었다. 둘 은 엉킨 채로 몇 번 구르더니 그만 벼랑 밑으로 떨어져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흐느끼는 우택에게 여인은 자기의 불찰이라며 용서와 고마움을 번갈아 표하였다. 그런데 우택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그 여인의 몸종도 그만 호랑이에게 먹혔던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둘 은 서로 마음이 통해 사랑 하는 사이가 되었다. 허나 그 여인의 집안과 사내의 집안은 격차가 매우 심하였다. 그 여인의 아버지는 조정에서 일을 맡던 사람이었고 우택의 아버지는 그냥 토호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남몰래 사랑을 키워 나갔다. 팔월 한가위가 되었다. 둘은 만나기로 약속 하였다. 여인은 장옷을 두르고 약속된 큰 바위로 갔다. 들뜬 마음으로 우택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서 왔는지 갑자기 큰 호랑이가 눈을 부라리며 나타났다. 그녀는 호랑이를 본 동시에 장옷을 버리고 달아났다. 호랑이는 장옷을 보더니 몇 번 킁킁 거리고는 갈기 갈기 찢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조금 뒤 우택이 나타났다.


그런데 여인은 온데 간데 없고 장옷만 찢어져 있자 우택은 그 녀가 호랑이 밥이 되었다고 생각 하고는 왈칵 흐느끼기 시작 하였다.


  "나를 두고 먼저 가다니... 우리 이승에서 못다한 인연 저승에서 이룹시다."
그는 그만 칼을 꺼내어 자결을 하였다.


한편 도망 간 여인은 약속을 떠올리고는 그 바위로 달려갔다. 그런데 거기엔 찢어진 장옷 위에 쓰러진 우택만이 있었다. 그녀는 이내 모든 것을 짐작 하였다.


  "이럴수가, 제가 죽은 줄 아셨군요."
그녀는 한 참을 울더니 그대로 그만 자결을 해버렸다. 이 남녀가 흘린 피로 바위를 검붉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바위를 먹정바위 또는 무정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참조)

 

 

새로이 중건된 개태사

 

 

 

 

개태사석불입상 보물 제219호

개태사가 고려 태조 때 창건된 것으로 보아 이 삼존석불 역시 고려 초기에 추정된 것으로 보인다. 삼존석상으로서는 巨作에 속하며, 고려시대의 불상을 대표할만한 한 작품이다. 본존은 높이 4.15m, 좌우협시는 각 3.21m이다.

 

 

 

 

개태사오층석탑

 

개태사철확

개태사에서 사용하던 철솥으로 지름 약 2m, 둘레 약 6.28m, 높이 약 0.97m이다. 솥의 규모로 보아 개태사가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가름해 볼 수 있다. 폐사 후에 들에 방치되어 있다가 가뭄에 솥을 옮기면 비가 온다는 전설에 의해 여러 곳으로 옮겨지다가, 일제때 한양에서 열린 박람회에 출품 후 연산시에 소재한 공원에 보존되어 왔다. 이후 1978년에 이곳 개태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와『가람고』를 비롯한 문헌에도 이 솥에 대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 중 『가람고』의 기록내용은 '『여지도서』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여지도서』의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輿地圖書' 忠淸道 連山 古跡條 開泰寺大鼎
'本寺舊址有大鼎 周圍可十餘把高可一丈. 氓俗相傳 本寺全盛時 僧輩?醬之哭也. 鑄成旣久 頗有靈異. 每當大早 民人輩曳置他所 則輒雨 今在邑西二里許. 頃年久早時 曳移在此云'


이 절 옛 터에 큰 솥이 있었는데, 주위가 능히 10여 파(把), 높이가 능히 1장이다. 세속에 전하는 바로는 본사 전성시에 승려들의 음식을 끓이던 것이라 한다. 주성(鑄成)한 지 이미 오래 되어 자못 신령스러움이 있다. 한발이 닥칠 때마다 사람들이 그것을 끌어 다른 곳으로 옮겨 두면 비가 내렸으므로 지금은 읍 서쪽 2리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한발 때마다 옮겨 이곳에 위치하게 된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