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의 길,맛,멋따라♣/절집 여행

소백산 깊은 골짜기에 살며시 자리잡은 희방사

들꽃(野花) 2010. 9. 14. 06:10

희방사

소백산의 희방사를 찾아가는 길

소백산을 가려면 단양읍내에서 고수동굴방향으로 올라가는길(이길은 결혼후 처음으로 집사람과 함께 걸어올랐다.)

그리고 소백산의 죽령에서 올라가는 길.

또한 풍기의 희방사를 통해 올라가는 길이 있다.

나는 소백산을 지금껏 두번 올랐다. 앞에서 말했듯이 집사람과 한번 올랐었고, 제대하고 제천 현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 고향선배, 후배 이렇게 셋이 소백산 철쭉제를 보러 올라갔었다. 그때 산에서 길을 잃어버려 위로만 가보자 하며 무작정 위로 올라가며 더덕을 캐며 갔던 기억이 난다.

예전에는 소백산을 가려면 풍기의 희방사를 통해서 올라가야 했다. 지금이야 자가용에 관광버스에 너무나 편히들 올라간다.

 

제천에 살았었기에 아무때나 갈 수 있었던 소백산의 희방사.

원래 그런가보다.

등잔밑이 어둡듯이 언제든지 갈 수 있다고 여기며 차일 피일 미룬것이 지금에서야 찾는다.

소백산의 죽령길을 얼마나 많이 넘나들었든가.

희방사의 안내표지판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든가.

그런 희방사를 이제 찾아간다.

 

 

단양공고 앞 하천에서 처가 식구들이랑 하룻밤을 보낸다.

낚시와 골뱅이 잡기, 사인암과 상, 하선암을 둘러보며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텐트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자장가삼아 잠을 청한다.

이른 새벽.

눈이 떠진다.

여기서 잠깐, 나의 여행을 보자. 깜깜한 새벽녁을 즐기는 사람. 혼자 일찍 일어나 주변을 나들이 하는 그런 스타일이다.

얼마전 여행블로거기자단 투어가 조령자연휴양림에서 하룻밤을 보낸적이 있는데 나는 기어이 남들 일어나기 전 문경세재 삼관문을 올랐으니 나의 열정을 알만하지 않은가.

 

깨운다.

집사람을 그리고 처남들을 깨워서 카메라를 챙기고 죽령재를 향해 간다.

죽령에 올라 잠시 쉬고, 희방사를 찾는다.

매표소 앞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어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간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입장료, 즉 문화재관람료를 받지 않는다. 우리가 매표소를 통과한 시간이 6시40분, 희방폭포를 보고 희방사에서의 마지막 사진 촬영시간을 보니 8시 5분, 그러니까  7시가 넘어서인지 입장료를 받고 있다. 그러니 2,000원씩 네명이나 8,000원을 아낀셈이다. 이럴때 기분이 좋다.

 

몇해전인가 동해안을 힙쓴 산불사진을 놓아 입장객들에게 산불의 위험을 알리고 있다.

 

여기를 꼭 살피고 가셔야 합니다.

예전에는 이 정면으로 보이는 길로 올라가면 희방폭포를 거쳐 희방폭포 옆길로 해서 희방사를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희방폭포 옆길이 낭떠리지라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다하여 폐쇄하여 절로 가는 도로로 돌아가야 한다. 즉 희방폭포보고 내려오고 다시 희방사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희방사로 가는 길이 콘크리트 도로라 재미없다.

 

 

숲속으로 희방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희방사

여기 기쁨을 주는 사찰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올라가고 있는 희방사입니다.

이유인즉, 희방사의 희자가 기쁠 희(喜)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희방사는 신라 때인 643년(선덕왕 12) 두운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창건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잇다.

 

 

신라 말, 고려 초에 경북 예천군 용문면 두인동에서 출생한 고승 두운(杜雲)조사가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당나라에서 선법(禪法)을 배워 와서 바로 이 소백산 줄기의 도솔봉 아래에 초암을 짓고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갔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정(定)에 들어 있노라니, 무엇이 조사의 옷깃을 건드리기에 돌아보니, 큰 범이 와서 문턱에 걸터앉아 입을 벌리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고 있었습니다.

 

조사는 '네가 배가 고파서 나를 먹으려 하느냐?' 라고 묻자, 호랑이는 고개를 흔들면서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입만 크게 벌리고 있었습니다. '옳지, 네 놈의 목에 뭐가 걸린 모양이구나.' 하고 목구멍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자의 비녀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것을 빼주고, '살생을 해서 축생보(畜生報)를 받게 된 까닭에 네가 지금 고통을 받는다.' 라고 설법을 하고, '살생을 삼가라.' 고 엄히 타일러 돌려보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또 그 범이 나타나서 조사를 밖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나가보니 문밖에 아리따운 처녀가 업혀와 있었습니다.

 

"네 이놈아, 나에게 은혜를 갚는다고 처녀를 업어온 모양인데, 중에게 처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너에게 업혀온 이 처녀가 얼마나 기겁하였겠느냐.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라." 하고, 그 처녀를 방으로 데리고 와서 팔다리를 주무르고 몸을 따뜻하게 하였더니, 한참 후에 깨어났습니다. 조사는 그 회생함을 기뻐하여 미음을 끓여 먹이고, "어디에 사는 누구인가?"

를 물었습니다.

 

"저는 경주(당시 신라의 수도)에 사는 아무개 재상의 딸인데, 어젯밤에 변소에 다녀오는데 무엇이 휙 하는 바람에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보니 여기 와 있습니다." 라고 처녀가 대답하였습니다.

 

"허, 고기는 만리요, 호랑이는 천리라 더니 하룻밤 사이에 삼사백리를 왔구나, 그러나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며칠 조리를 잘 해서 기운을 차리면 내가 데려다 주마." 했습니다. 처녀는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리며, '스님이 시키시는 대로하겠습니다.' 고 했습니다.

 

한편 딸자식이 갑자기 없어진 재상 댁에서는 호식(虎食)되었다며, 수많은 장정을 동원하여 산지사방을 찾았으나 종적이 묘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당을 들이고 유명하다는 점쟁이를 들이고 굿판을 벌이는데, 조사께서 처녀를 데리고 당도하니, 꿈이냐 생시냐 하며 울음보가 터뜨렸습니다.

 

처녀의 아버지 재상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조사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전후 사정을 밤 새워 이야기하고 며칠을 쉬고 난 뒤에 조사가 돌아오려고 한즉 재상이 한사코 말렸습니다.

 

"이것이 모두 인연인데 산으로 갈 것 없이 여기서 부귀를 같이 하자." 고 진심으로 권했습니다. 조사께서는 "부귀영화는 저에게는 필요 없습니다. 굳이 무엇을 주시고 싶으시면, 제가 있는 토굴이 협소하니 그것이나 좀 넓혀주십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재상이 쾌히 승낙하고 그 부근의 각 고을 수령에게 통지하여 좋은 터를 가리어 큰 절을 짓게 하여, 이름을 '희방사' 라고 짓고, 두운 조사님께 바쳤습니다.

 

경주호장은 이것으로도 은혜에 대한 보답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죽령고개 아래 마을 계곡에 무쇠다리를 놓아 주었는데, 지금도 고개 밑의 마을을 수철동(水鐵洞)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참조> 

 

 

 

설법당, 현대식 건물이라 사찰의 분위기를 조금 떨어뜨리고 있는 것 같다.

 

 

 

 

대웅보전 

 

 

 

 

 

 

 

 

소백산 정상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