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의 진관사
북한산의 비봉과 향로봉으로 오르는 초입, 삼각산의 정기를 받아 빼어난 정경과 수림을 자랑하는 길끝에 한양의 4대명찰이라 불리는 수륙도량 진관사가 있다.
진관사는 조계사의 말사로, 동쪽의 불암사, 서쪽의 진관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다.
꼬불꼬불거리는 협소한 도로를 따라 오르는 산길, 계곡과 맞닿은 나지막한 길, 그리고 사찰을 표시하는 일주문이 보이고, 그 길 끝에 사찰의 풍경을 자아내는 비림과 자그마한 돌담들이 보인다.
일주문을 지나서 돌담이 시작되는 곳은 바로 진관사 가람의 초입이다.
고즈넉한 산사, 울창한 산림, 그리고 삼각산에서 흘러내리는 시원한 계곡물 소리가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곳, 바로 이곳에 명찰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신라 진덕여왕 때(647-654) 원효(元曉)가 삼천사(三天寺)와 함께 창건한 신혈사(神穴寺)의 전신으로, 1011년에 현종이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서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야기는 고려 경종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981년(경종 6)에 경종이 죽자 천추태후가 왕비가 되어 김치양과 정을 나누게 된다. 이에 사생아를 낳게 되는데, 이 때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태조의 아들인 욱(郁; 安宗)의 직손인 대량군(大良君) 순(詢)이 왕위 계승자로 봉해진다.
이를 기회로 태후는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해 목종에게 참소하여 대량군을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임을 꾀한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량군을 조사 진관(津寬)이 혼자서 수도하는 신혈사로 축출하게 된다. 이 사실을 눈치 챈 진관은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지하굴을 파서 12세인 대량군을 숨겨 태후가 보낸 자객이 찾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대량군은 이곳에서 3년을 보내게 되는데, 심신이 허약한 목종이 심장병이 걸리고, 1009년(목종 12)에 목종이 죽자 대량군이 현종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이에 1011년(현종 2)에 왕위에 오른 현종은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워 사찰을 스승의 이름을 본따 진관사라 하였다.
그 뒤 절은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라 하여 고려시대 여러 임금이 행차하는 등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게된다.
엊그제 북한산일대에 집중호우가 내려 계곡물이 넘쳐흐르고, 일주문 근처에도 계곡물의 흔적을 알 수 있다.
저 돌담이 끝나는 곳에서 진관사가 우리를 반긴다.
시커먼 구름속에 자태를 들어내고 있는 진관사와 북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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