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가을날
광화문사거리에 있는 광화문광장으로 카메라를 멘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모이고 출석을 확인하자 여기저기서 카메라의 셧터의 눌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블로거기자들의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얼마전 어느 방송사 1박2일의 종로구편을 내보낸적이 있었다.
강호동, 이수근, 김종민, 은지원, 이승기가 종로구의 다섯 지역을 서로 나누어 종로의 아름다움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강호동은 광장시장에서 맛의 미각을, 이수근은 서울성곽중 창의문을 거쳐 백악산을 넘으며 1.21사태 당시 총을 맞은 소나무와 노루를 감상하는 코스를, 김종민은 북촌한옥마을의 팔경을, 은지원은 백사실계곡에서의 개도맹을 찾는(개도맹이란 개구리, 도마뱀, 맹콩이를 말한다.), 이승기는 이화마을을 찾아 천사의 날개를 찾아 천사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종로를 알리는 방송이 나온적이 있었다.
그리고 종로구청에서는 북촌한옥마을, 이화동 벽화마을, 서울성곽스탬프투어, 백사실계곡, 떡박물관 등을 알리는 기회로 여행과 맛집 등을 소개하는 우수블로거, 파워블로거 30여명을 초대하여 종로구를 알리는 투어를 하였다.
여기가 1박2일 종로팸투어의 시작이다.
서울성곽의 와룡공원으로 이동하는 차안에서 1박2일 투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으며 우리가 도착한 곳은 용이 누워있다는 와룡공원이다.
오늘의 주제는 서울성곽걷기, 서울성곽 스탬프투어 체험이다.
우리가 성곽을 걷는 구간은 와룡공원에서 시작하여 흥인지문(동대문)까지의 길로 성곽을 안팍으로 걸으면서 선조들의 축성 기술을 살펴보고 역사의 소중함을 느껴보려고 한다.
단풍의 계절이지만 아직 색색이 옷을 갈아입지 못하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성곽길을 걷고 있다.
문화재청에 의한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는 서울성곽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으로 조선 건국 초에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성곽의 둘레길이 약 17㎞, 4개의 대문과 4소문들을 두었다.
4대문은 인의예지를 인용한 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특히 흥인지문의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출발지인 와룡공원
저멀리 남산이 보인다.
성곽은 인공을 가하지 않은 자연석으로 쌓았는데, 기초석이 장대하고 성벽이 수직형이며 돌과 돌 사이에 작은 돌을 메꾸는 등 그 축성방법이 조잡했다. 성의 기초부분이 높고 험한 곳은 석성으로 하여 높이 15척, 총연장 1만 9,200척이었고, 낮고 평탄한 곳은 토성으로 축조했는데 아랫단의 너비가 24척이며 윗단의 너비가 18척이고 높이가 25척으로 총연장 4만 300척이었다.
이때의 공사는 짧은 기간에 17㎞ 이상의 장성을 축조했기 때문에 견고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1396년 8월부터 경상도·전라도·강원도의 백성 7만 9,400명을 징발하여 2차 공사를 시작했다. 2차 공사는 동대문 부근 등 봄철공사에서 완성하지 못했던 곳의 완축과 여름철 장마로 무너진 곳의 개축, 그리고 낮은 성의 보수, 성문의 누각을 짓는 일 등에 주력했다. 아울러 도성의 8개 성문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는 1차 공사에 대한 보수·완성을 위한 공사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공사는 그해 9월 24일 종료되었지만 그후에도 군인·승도 등에 의한 부분적인 보수는 계속되었다.
서울성곽이 도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1422년(세종 4)에 와서야 가능했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서울성곽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성을 모두 돌로 완벽하게 쌓았다. 둘째, 성가퀴(女墻)를 높게 하여 방어에 만전을 기했다. 셋째, 수문(水門)을 증설했다. 넷째, 성문을 개수하거나 옮겨서 설치하여 도성 출입문으로서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다섯째, 성 주위 안팎에 큰 길을 내었는데, 이는 순찰과 유사시의 대비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였다. 여섯째, 성 주위를 확장했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아래의 경신고등학교 바로 전으로 이제는 성곽밖으로 걸어야 한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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